17. 남쪽
주위를 둘러보면 계절에 맞게
붉게 물든 색깔들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누구의 땅인지 모를
농사를 짓는 밭였는지 모를
이 땅들은 굉장히 비옥해 보인다.
시선을 멀리 두고 있을 땐,
지평선 끝에서 솟아오르는 초록과
갈색 붉은색의 산이 떡, 하고 버티고 서 있다.
하즈키는 이른 아침마다
이 광경을 보고 숨을 고르면
마음이 편안하다며
코하네에게 애써 말했다.
몇 번이고 각오를 다짐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하즈키가 직장에서 적응하기란,
참 모진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고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코하네의 도움을 받아
꼭 필요한 대화는 익힌 그였다.
노아는 일본에 가기 전,
이곳에서 짧은 시간 동안
선교사 활동을 했다.
그때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즈키는 직장을 구할 수가 있었고
고맙게도 그곳은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였다.
물론, 하즈키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렵지만
가장이 못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용어나 대화에서
막힘이 생겨 버리면
어떤 기술을 갖고 있어도
버텨내기란 참 버거운 것이다.
실력은 면접에서도
플러스가 되는 장점이 되지만
언어로 막힌 그것은 장점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다.
운 좋게도 아무 기술이 없었던 그때처럼
하즈키는 이곳에서도
같은 일을 맡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언어보다 가장 힘든 건
운전대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수십 번의 접촉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는 아주 침착했다. 하즈키는 이 모든 것은 온전히
그의 덕이라며 감사함으로
자주 노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하즈키가 출근한다는 건,
코하네의 목소리를 하루 종일
듣는 일이 되어 버렸다.
코하네는 친절하게도 퇴근 후,
지쳐 잠들기 바쁜 그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로 유명한 책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가끔 무슨 뜻인지 모를 단어들이
튀어나오면 코하네는 그의 마음처럼
부연 설명을 따로 녹음하기도 했다.
참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완벽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한 달여 정도가 지난 지금도
하즈키는 조금씩 적응해 나가려
애쓰는 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매일의 삶을
애쓰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이 정착한 집은
하즈키가 도보로 출근하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코하네의 목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그들의 집은 도쿄의 집과 아주 달랐다.
어렵게 맞은 휴일,
늦잠이라도 자려 치면
빠르게 하즈키의 눈 위를
비추는 해가 보인다.
도쿄에서는 제일 먼저 눈을 뜨면
맞은편 건물의 그늘진 그림자에서
코하네를 보지만
지금은 허공에 떠 있는 해를 본다.
집은 정확한 남향이다.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집을 둘러싼 울타리는 없었다.
하즈키의 섬세함으로
아주 낮은 울타리를 만들 수가 있었다.
대충 만들긴 했지만
제법 괜찮은 나무로 만든
대문도 생긴 셈이다.
그 안에서 료카는 열심히 뛰어놀았다.
또한 혼자만의 소꿉놀이를 즐겼다.
료카의 친구는 아직 없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를 하얀 고양이가
꼭, 아이의 옆을 지켰다.
아마도 료카가 하얀 고양이의
끼니를 챙겨주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꿉놀이의 대상은 늘
하얀 고양이다.
가끔 귀찮다는 듯 꼬리를
추켜올리며 어디론가 사라져
료카의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하얀 고양이는 어느새
아이의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료카는 자주 하즈키를 놀라게 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빠르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
그 점은 아마도
엄마를 쏙 빼닮은 게 확실하다.
이곳에서 코하네의 삶은
어느 곳을 가거나
어떤 누구를 만나거나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그녀에게
아주 적합한 곳이다.
코하네의 삶은 굉장히 바빠졌다.
이른 아침,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걸을 수 있으면 걸어 다녔고
버스를 타야 했으면 버스를 탔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어렵지 않았고
그녀는 늘 설렌다고 말했다.
후미코와 같은 사람들이
주위에 그림책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많다고 했다.
후미코의 사진처럼
검은 머리를 뒤로 쪽을 지고
매우 닳아 보이는
계량된 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허리는
대개 휘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설명할 때마다
그녀의 작은 눈은 굉장히 반짝거렸다.
이곳에는 마을 회관이라는 곳이 있다.
부녀회라는 말이 아직 낯설지만,
그곳은 대단한 곳이 분명하다.
마을 회관에서는 조금씩
모이는 돈으로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해서 서로 나누어 먹는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베푼다.
한국이란 나라는 알면 알수록
정이 가득했다.
코하네는 가끔 그곳에서
한국 음식을 배워 왔다.
코하네가 정성스럽게 내온 음식은
잡채라는 음식이다.
처음 먹어보는 맛과 식감은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료카는 좋아하는 하얀 쌀밥은
제쳐 두고 탱탱한 면과 채소를
흡입하듯, 쩝쩝거리며 잘도 먹었다.
그날 이후 잡채라는 음식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되었다.
그들의 시간은 아주 빠르게
이곳에 잔잔하게 스며드는 중이다.
마치 처음부터
한국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후미코의 유골은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
한국의 삶을 계획했을 때부터 인가,
코하네는 후미코를 꼭
데려오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후미코의 고향에 남은
진짜 가족들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가슴을 쥐며 코하네를 보며 울먹였지만,
코하네의 가슴속 깊이
그 감정은 오지 않았다.
그들이 울먹이는 감정을 가짜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짜라는 건, 코하네의
발바닥 밑 깊은 곳에 숨겨두고 싶었다.
“하즈키, 당신이 함께 가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에요.”
“무슨 말이야?”
“그분들을 마주하고 나니, 정말 우울해요.”
하즈키의 표정은 심각했고,
진정으로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이런 모습이 진짜 감정일 것이다.
“그렇지, 잃어버린 가족이니까.”
코하네는 가볍게 또 쓸쓸하게 웃고 고개를 끄덕인다.
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후미코의 유골을 그곳에 묻어야 할까,
라는 것에 대한 답을 해 줄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니 말이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료카가 말했다.
“엄마, 난 집이 좋아요, 진짜 집이요.”
“응?”
“그러니까, 할머니도 그럴 거예요.”
코하네는 마치 예전에 마호가 떠올랐다.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던
그녀만의 해결사, 마호,
어린 료카는 이제 그녀에게
마호 같은, 그런 존재다.
그녀는 오랫동안 쓰지 않던
말을 료카에게 뱉는다.
“친절한 나의 공주님.”
때마침, 미국을 건너간
유키코가 구둣방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일본을 건너갔을 때였다.
구둣방을 정리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했다.
유키코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특히 그의 어머니가 걱정이었다.
구둣방이 필요한 사람이 몇 달 후나
들어올 수 있다며 시간을 달라고 졸라댔다.
그렇다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몇 달 후, 다시 또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키코는 그 짧은 시간에
미국에 완전한 적응을 했다고 한다.
완벽한 자본주의 사회에
마치 길들여진 사람처럼 말했다.
“구둣방을 제값에 넘기려면
그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별수가 없어.”
코하네는 그 말을 듣고 웃어넘기지만,
그 말은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곳이 어떤 곳이었던가,
잊힐 추억은 없다.
유키코는 그 시간 동안
제값이라는 것을 위해서
구둣방을 정리하고 꾸밀 것이라고 했다.
유키코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코하네의 오랜 고민 끝에
후미코의 유골을 그녀의 진짜 집으로
데려가려 마음먹었다.
료카의 말처럼 후미코의
진짜 집으로 말이다.
코하네는 늘 부탁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유키코는
흔쾌히 자기의 일인 것처럼 말했다.
“물론이지, 정말 다행이야,
내일이라도 당장 준비할게.”
“아, 유키 전 늘 감사한 일만 만들죠?
너무 감사해요.”
“코하네, 걱정 마.”
그렇게 한 달쯤 후 후미코의
유골이 도착했다.
코하네는 후미코의 유골을
고이 들고 온 그,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키코는 코하네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아의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터였고 유키코는 홀로
일본에 머무는 노아가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이 이렇게 불행하게 일어나야 하는지
유키코는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노아의 어머니는 끝내 집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유키코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급히 미국행 티켓을 구했고,
제일 먼저 눈앞에 떠오르는
먼저 떠난 노아를 걱정했다.
유키코는 미안함과 상실감에 휩싸여
정작 전화를 붙잡아 놓고도
그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노아는 쓸쓸하게
유키코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유키 괜찮아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유키코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
먼 곳이지만 노아는 그녀와 함께 했다.
유키코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기를 들었다.
고맙게도 마호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마호의 밝은 목소리에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날아가는 것 같다.
“아, 마호, 직접 받다니 너무 다행이야.”
마호는 생각할 겨를 없이 대답했다.
마호의 목소리는 정말 놀랐다는 억양이다.
“앗, 유키코? 유키? 맞아요?”
“으응, 잘 지내고 있는 게 맞지?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하하, 네네 유키도요?
앗, 근데 들어온 거예요?”
“응, 구둣방 때문에.”
“언제 들어가요?
한 번 갈게요.”
“그게 음, 노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아아, 유키.”
“응, 그래서 급히 들어가 보려고 해.”
“죄송해요.”
“응? 마호가 왜?
그런 소리 마.”
“노아에게 제 마음을 꼭,
전해주세요.”
“고마워, 꼭 그럴게.”
유키코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인데,
참… 부탁이 있어 마호.”
그는 빠르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지 편히 말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아,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마워.”
그녀가 침을 꼴깍, 하고
넘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 그러니까, 그래 쉽게 말할 게,
코하네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니 아니야, 마호.
그런 게 아니야.”
그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유키코의 긴 이야기를 모두
듣기도 전에 마호는 대답했다.
“제가 할게요, 걱정 말아요.”
“이건 정말 하면 안 되는 부탁인걸,
알고 있지만, 방법이…
그렇다고 죽은 후미코를
실망하게 둘 수는 없었어.”
“아, 걱정 말아요.”
어쩌면 유키코 보다
코하네가 살던 옛집을 더
꿰뚫고 있는 마호다.
마호는 오랫동안의 대화를 끝낸 후,
전화기를 내려놓으려 다
그것을 놓쳤다.
손바닥을 펴 보니 마치 손을
방금 씻은 사람처럼 땀이
흥건하게 내려앉아 흘렀다.
바보같이 그는 후미코 유골의
소중함보다, 코하네를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자신이 참 속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하, 아니야.”
어찌 후미코의 유골을
홀로 비행기에 태워 보낸단 말인가,
마호는 차마 그렇게 하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더 컸다.
유키코가 불러 준 코하네의 주소를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불러 주는 알파벳을
그대로 적었지만 입에 붙지 않는 말이다.
코하네를 따라 한글을 공부했지만,
영어로 쓴 한글은 정말 읽기가 어렵다.
마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호는 빠르게 짐을 싸기 시작한다.
마호의 동선이 바빠지자,
차를 마시고 그를 구경하던 미쿠는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 건지
눈에 딱, 들어오곤 했다.
마호는 분명 긴 여행을
시작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호의 동선이 멈추면
그에게 물어볼 작정이다.
마호도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미쿠를 모르지 않았다.
기다려 주고 있는 미쿠가
내심 참, 고맙다.
마호의 짐 싸기는 마치 버릇인 것처럼
간단했고 빨랐다.
미쿠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설명할 작정이다.
미쿠는 마호가 이야기를 늘어놓자,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켄타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린다.
“화내지 않으면 다행이야.”
겐타의 말이 백 번 옳다.
미쿠는 자기 아들이 상처받았던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마호가 아무리 혼자 한 사랑이라도
미쿠는 그랬다.
하지만 아들이 뭔가를 하려고
나섰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라 생각했다.
미쿠는 마호를 항상 믿었고
그의 생각이 늘 먼저다.
마호는 현명한 아이라고
늘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쿠는 물어봐야 했다.
“아들?”
“말씀하세요.”
“꼭 그 일을 할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거야?”
마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해야지,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한데 네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응?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걱정 마세요.”
켄타가 끼어들었다.
“사람이 말이야,
갖지 못할수록 더 욕심이 생기는 법이야
하지만 그 욕심은 때론
불행을 몰고 와, 잊지 마라.”
마호는 두 사람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녀석.”
마호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그들과 한 시간도 채 앉아 있지 않고
그곳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늘 매고 다니던 여행용 배낭이
왜 그리도 가벼운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선 나고야행 비행기를
먼저 탈 생각이다.
리리카의 대화는 도쿄로 와서
그때 할 작정이다.
그냥 무작정 떠날 수도 있었지만
리리카의 신뢰를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충분히 리리카는 마호에게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캄캄한 밤이 되어서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을 마주한 마호의 몸은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 남아있었다.
유키코가 미리 관리인에게 얘기했는지
그 넓은 곳의 대문이 열려 있었고,
추억이 기억하는 대로 들어서자마자
그때와 같은 나무 냄새가 흘러나왔다.
오래전 그때 보다
집의 형체를 이루고 나무는 더
젊어진 것처럼 보인다.
칠해 놓은 반짝거림은 또 무엇인지,
어색하기까지 하다.
전날 내린 눈이 꽤 쌓여 있었다.
한쪽으로 쓸어 놓은 눈을 보니
관리인의 성격을 알 법도 했다.
마치 아키라처럼 말이다.
푸석해 보이는 향초에
불이 붙을까,라는 걱정을 했지만
이미 꼽힌 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관리인은 아키라가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고 들었다.
향초를 보는 순간 그 사람이 무척 궁금해졌다.
마호는 예를 갖추고
천천히 나무로 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후미코의 유골함도
나무로 된 마루가
반짝거리는 것처럼 반짝거린다.
재빨리 배낭에서 두꺼운 천을 꺼내
들어 유골함을 올려놓는다.
정성스럽게 유골함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묶고 또 묶었다.
그가 중얼거린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꽤 추운 날씨에 유골함을 정리한
손바닥에서 또 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그는 밤바람에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다.
당연히 차 편이 끊긴 지금,
하룻밤을 묵을 곳을 찾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공기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에 어림없다.
마호는 다시 배낭을 메고
예를 갖춘 후,
아주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극심한 추위를 느끼기보다
코하네의 냄새를 느낄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마호는 코하네의 대한,
그곳에 대한 기대를
지워버리려 애를 쓰며 걸었다.
“설마, 있지 않을 거야.”
눈앞의 광경에 그는 발을
뒷걸음질 칠 정도로 놀랐다.
그곳은 정말 사라지지 않았다.
코하네의 옛집이 아직도
온기를 품을 채,
남아있는 것과 같았다.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발걸음은
느릿느릿하다.
머물러 있길 바랐지만
정말 머물러 준 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국숫집인 것을…”
그는 피식, 거리며 웃었다.
여전히 그곳의 가게 이름은
따로 있지 않았다.
변한 건, 새로 달아 놓은
초롱의 불빛이 은은하게
주변을 밝혀 주었다.
마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12시가 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주인장의 성격은
그를 당연히 내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발걸음을 들여놓기 전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서운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다.
마호는 문을 밀었다.
그때의 온기와 그때의 냄새가 빠르게
심장 안을 파고든다.
저절로 그의 입에서
숨이 길게 배어 나오며
아랫배가 저릿했다.
“으하아.”
아주 조용한 공기 속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마호의 입에서 앗, 하는
소리가 나왔다.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바람이 무섭죠?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몸부터 녹이시죠.”
남자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얼굴로
수염이 꽤 길었다.
아키라처럼 말이다.
“네, 감사합니다.”
그때의 난로가 지금의 것인지는
가늠은 안 되지만 꽤, 낡은 모습이다.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면서
콧등과 이마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기 제가 좀 늦었나요?”
남자가 말했다.
“하하, 아닙니다 손님.”
마호는 보이지 않던 아주머니가 궁금했다.
하지만 대뜸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치 아주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떤 사정이
생겼을지도 모를 실례가 되는
물음이 될 것이다.
여전히 메뉴도 같을까,라는
생각에 찾았지만 어디도 없다.
마호는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따뜻한 국수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소주도 함께요.”
남자는 주전자의 보리차를
따라내며 말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는 의자에 걸어 둔
앞치마를 능숙하게 매더니
커다란 밥솥에서 물수건을 꺼내
그에 내밀었다.
마호는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수건의 온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발개진 얼굴에 온기가 더해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마치 술에 취한 듯한
기분이 참 좋았다.
노곤함에 피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배고픔도 잊을 만했다.
그때 뜨거운 김을 풍기며
남자가 다가와 국수를 놓고
장아찌와 풋콩,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쿠리를 내려놓는다.
밀려오는 피곤함에
배고픔을 잊었었나,라는
생각이 무색하다.
국수가 풍기는 육수 냄새에
벌써 입 안은 침으로 가득했다.
“맛있게 드세요.”
마호의 가슴에서
정말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나왔다.
“감사합니다.”
술의 첫맛은 달콤하고 끝맛은 쓰다.
그는 술을 따르고 마시고
젓가락으로 국수를 퍼 입에 나르고,
정신없이 해치웠다.
육수만 덩그러니 남은 국수 그릇을
마저 입으로 가져가 흡입했다.
“하아.”
작은 텔레비전 속에서
아주 많은 눈과 강풍이 불어오니
단단히 채비를 준비하라는 얘기다.
갑자기 그는 급한 마음이 들었다.
“저기, 혹시 근처 여관이 있을까요?”
남자는 일 초의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시면 바로 여관입니다
다행히 오늘은 방이 비어 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나무젓가락을 통에 담으며 말했다.
“이곳 분이 아니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네, 아닙니다.”
마호는 틈을 타 이제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라며
머뭇거린다.
“저, 실례지만.”
“네 말씀하세요.”
“혹, 예전 이곳에 계시던 아주머니는…”
남자의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며
그의 말을 끊고 이어갔다.
“그렇군요, 그랬어요 어쩐지
이곳을 아는 분 같았어요.”
마호가 미소 짓는다.
“네 오래전에요.”
“제 누이랍니다
누이는 일 년 전 떠났어요,
남길 게 없다고
쓸쓸하게 웃곤 했는데…
그 사람, 참 떠날 때 마저
쓸쓸하게 보내기가 싫더라고요,
내가 그랬어요,
국숫집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내가 있을 거라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냈습니다.”
남자는 공책 한 권을 들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일기처럼 적어 놓은
이것 덕분에 국수 맛은
괜찮을 겁니다
손맛은 따라갈 수 없지만… 하하하.”
마호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분을 잘 알진 못했지만 안타까움이 컸다.
진심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식은 도쿠리는 이제
맨손으로도 거뜬하다.
남은 술을 따라냈다.
“아주머니는
정말 따뜻한 분이셨어요,
제 친구는 그분을 보고 있기만 해도
온기가 느껴진다고 했어요,
그분이 쥐여 준 알사탕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사탕이라며
이곳을 다녀간 그 하루는
이곳의 얘기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답니다.”
남자의 눈빛은 쓸쓸해 보였고,
또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마호의 얘기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뭔가를 생각해 냈는지
약간의 목소리 흥분되어 있었다.
“앗, 그럼 혹시
그 친구분은 여자입니까?”
마호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순간 남자의 얼굴은
더욱 웃음이 만개한다.
“하하하하하,
누이가 왜 이 가게를
놓지 못했는지 알 것도 같군요?
그 친구분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누이를 보면 온기가 느껴졌다고,
그 알사탕이 아직도 있냐고
내게 물었죠.”
마호는 애써 그녀의 자취를
왜 잊으려 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코하네는 당연히
이곳을 자주 들르지 않았을까, 라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고,
온기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신 듯한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혹시, 이곳에 왔었나요?”
그는 질문을 해 놓고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너 달 전, 인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왔어요,
작은 여자아이요,
얼마나 총명하던지, 참 예뻤답니다.”
“아… 료카.”
마호는 남자를 앞에 두고
소주를 몇 병이든 마시며 밤새도록
그 이야기만 반복하며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남자는 그의 쓸쓸함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술, 한 잔 더 하겠어요?”
마호도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아주 쓸데없이 말이다.
“하하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아마 내일은 눈이 아주 많이 내릴 겁니다.
혹시 신칸센을 탈 건가요?”
마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눈이 쏟아지기 전
아침 일찍 떠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호는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십 년 후에도, 이십 년 후에도
이곳이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알사탕을
한 움큼 집어 그의 배낭
앞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앗.”
“거절하지 말고 가져가요
긴 여행에는 달콤함이 필요할 테니...”
“감사합니다.”
“왼쪽으로 내려가요,
뛰지 말아요 바람 때문에 더 추우니.”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또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언제든 와요,
언제든 이곳은 사람처럼
사라지는 곳이 아니니까...”
마호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아주머니에 대한 인사와 함께
그곳에 감사의 마음을 남겨본다.
남자의 말대로 그는 알사탕을
입에 물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몇 발걸음을 걷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초롱불이 꺼진다.
영업시간이 아니었다는 게 분명했다.
남자는 분명 그를 내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맞았다.
그 시간, 남자는 무엇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또다시 쓸쓸하다.
아주 오래된 여관이었다.
날씨처럼 카운터를 지키는
남자 직원 외에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금 으스스한 기분도 들었다.
짙은 나무와 돌로 꾸며진 곳이라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곳치곤, 꽤 깨끗했다.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마호를 보지도 않고 기계처럼 말했다.
이른 아침 떠난다는 얘기에
남자는 시간을 확인하며
쥐고 있던 펜을 흰 종이에 대고
툭툭거렸다.
“흠, 시간이 애매하네요.”
마호는 어리둥절
남자를 올려 보았다.
“네?”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냥 3천 엔만 내십시오.”
남자는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듯 말했다.
마호는 금액이 비싸면
시간을 조정해서 줄여 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호는 굉장히 억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으스스한 분위기에
인상까지 찌푸리고 싶지 않았다.
“아, 감사합니다.”
남자를 따라 방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손님도 없는 듯한데 왜 자신을
구석진 방으로 안내하는 건지
심술궂은 사람임이 틀림이 없다.
남자는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열쇠를 그에게 내밀며
다시 딱딱, 거리는 소리를 내며 되돌아갔다.
마호는 배낭을 조심스레
바닥에 놓고, 깔아 놓은 이불에
넙적 누워 버렸다.
모든 기가 바닥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호는 시간을 확인한 후,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잠이 들어 버렸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꽤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정확히 시간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맞춰 놓은 알람은
미리 일어난 그에게 소용이 없다.
그는 서둘러 김이 나는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틀 만에 자란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이 정도는 괜찮아.”
덥수룩한 수염이 있는 모습을
리리카는 싫어한다.
아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배낭을 열어 후미코를 확인했다.
그리곤 다시 정성스럽게
꼭꼭 싸매어 배낭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카운터에는 어제 그 기분 나쁜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화사하게 미소로
인사하는 여자 직원이 있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다행이다, 싶었다.
여자가 열쇠를 받아 들고 말했다.
“어쩌죠? 지금 가시면
조식을 못 드실 텐데요?”
마호는 조식이 있다니,
조금 놀란 눈치다.
허전한 뱃속이 발걸음을
멈출 만도 했지만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아마도
으스스한 이 여관에서 기분 나쁜
표정의 남자를 며칠 꼬박
봐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첫차를 꼭 타야 해서요,
말씀 감사합니다.”
“아,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자는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손에 들고 온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 금방 삶아 나온 달걀이에요,
오늘 메뉴에 포함되는 거죠.”
그는 정말 고마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달걀은 여자에게 풍기는
온기처럼 따뜻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호는 다시 뒤를 돌아보며
인사할 정도로 고마웠다.
따뜻한 달걀 덕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역시 밤사이 바람은 더욱 강해진 듯하다.
내내 하지 않았던 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지만 추위가 대단했다.
다른 지역보다 1, 2도는 따뜻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은 날씨였다.
어렵게 탄 택시 안 유리는
온통 김이 서려 앞도 옆도
뒤도 잘 보이지 않는다.
택시 기사는 운전대를 마치
가슴에 안고 있는 듯,
조심스럽게 액셀을 밟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습기를 가득 머금고
마치 얼음덩어리가 된 것처럼
비와 함께 섞여 큰 덩어리로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그것은 바닥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조금씩 쌓일 것이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마음이 조급해지며 손바닥을
뒤로 젖혀 배낭의 밑바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호는 도쿄행 표를 끊고 나서야
쉬지 않던 숨을 몰아쉬며 학학거렸다.
“하학, 학학학 으허.”
다행히 첫차를 탈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그는 미리 기차에 올랐다.
꼭, 메구로의 옛집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후 우우.”
사실 마호는 바로 한국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실망할, 리리카를 생각하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미쿠에게 들을 얘기였다 해도
직접 그녀와 마주 보고 하는
얘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미리 전화로 리리카에게
대충 얘기는 해 두었다.
큰 실망은 없을 거다.
마호는 다시 마법처럼 잠이 들었다.
어떤 날카로운 소리도
그를 깨우지 못했다.
주머니 속 따뜻한 달걀에 몸이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