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한국

16. 정착

by 금봉




낮은 바람이 불고 새벽녘 숨을 내쉴 때

입김이 하얀 구름을 만드는

계절이 오면 섬은 조용하다.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 소리도

들릴 것만 같다.

마호의 하루는 늘 그렇듯이

새벽부터 시작이다.

모든 공기와 색깔이

파도에 물든 이 시간이 참 좋다.


리리카는 여러 방면에서

참 똑똑한 여자다.

가끔 얄밉게 구는 모습에

약 오르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이제 마호에게 리리카의 자리는

꽤 비중을 차지한다.

마호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처럼

자연스럽게 늘 곁에 붙어 있었다.


한 달 한 번씩, 리리카가 머무는 시간이

이젠 예전처럼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미쿠는 리리카가 오는 시간을

꼬박 일주일 전부터 기다리다

리리카와 마주하면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리리카는 마호가 부탁한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왔다.

그것들을 어렵게 구했다며

섬에 도착해서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까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마호는 이제 그 소리도 싫지 않다.


고요함에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쌀쌀한 날씨에 손이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마호는 낯설었던 그 글을 제법 잘 읽어 내려간다.

뜻도 물론 습득하며

자주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다.


코하네의 나라는 문화적으로도

일본과 친하지 않았다.

그들의 문화적인 면을

경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를

그 어떤 누가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틈을 타 파국을 일으킨 국가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진정성 없는

자국의 이기적인 노력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어떤 사과와 반성도 진정성 없이는

용서하기 힘들 것 같다는

코하네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이번에 리리카가 구해 온 것들은

그때의 일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대로 베낀 것을

누군가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두스에 오는 고객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위험한 물건, 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쨌든 리리카는 문제없다는 식의 말로

웃어넘기며 가끔 놀라운 것들을

마호에게 안겨 주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왜, 갖고 있었는지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읽기가 거북할 정도로 내용은 참혹했다.

일기처럼 적어 내려간 이것은

누가 꾸며낸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믿고 싶은 정도의 내용이었다.


마호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내 나라가 이리도 끔찍하다니...’


파도 위에서 점점 높게 떠오르는

태양에 눈이 부시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의 선명함과 모양을 보면

오늘 하루의 날씨가 판단된다.

마호는 읽어 내려가던 책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호는 달리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달릴수록 차갑게 내려가던

손가락의 온도가 뜨거워지는 중이다.

손끝으로 무언가 내려오는 것처럼

조금씩 간질거린다.


모래 위를 빠르게 달릴 때마다

지나온 고통의 시간과 맞물린다.

모래 위를 빠르게 달릴수록

허벅지의 근육은 뜨거워지고

아릿한 통증이 밀려온다.

마호는 아주 가끔 유키코에게 또는 노아에게

코하네의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들을 때마다 코하네의 행복은

배가 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소식들로 가득했다.


코하네의, 아니 그들의 아이가

벌써 여섯 살 생일이 맞이했다는 소식이

마지막 이야기였다.

유키코가 내민 사진 속 아이는

하즈키의 얼굴을 위에 얹혀 놓은 것처럼 같았다.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 놓은 것 같은

아이의 피부는 역시 코하네의 모습과 같았다.


아이의 얼굴은 워낙 강렬하게

남는 인상이어서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릿속으로 아이의 얼굴이 동동 떠다닌다.

작은 코하네가 아이를 업고,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비위를 맞추며

웃어 주는 엄마,라는 존재라니

마호는 여섯 해나 지난 세월이

조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곧 허벅지의 통증은 마비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기 시작할 것이고

숨이 입안까지 차오르고

고통의 끝에 다다르면

그때 달리기를 멈추면 된다.


“으허헉 으헉 으헉 헉헉.”


무릎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자

잊지 않고 입안에 고인 침이 모래 위에 툭, 떨어진다.

차오른 숨이 심장까지 내려가야 그것들은 멈춘다.


“후우하아아.”


어느새 세상의 색깔은 그들 고유의 색을 띠며

태양은 파도 위에서 유난스럽게 반짝였다.


리리카에게 내어준 숙소는

마호의 숙소 바로 맞은편이다.

겐타와 미쿠는 그 방을 아예

숙박용으로 내놓지 않았다.

그 방은 처음부터 리리카의 방이 되어 버렸다.

리리카는 이른 아침부터

미쿠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미쿠의 최대 관심사는

문두스의 손님과 숙박하는 손님들 얘기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 소리가

겐타는 싫지 않은 모양이다.


“당신은 마호 녀석만

집에 있을 때와는 영 딴판이야.”


미쿠가 미소 짓는다.


“하하, 그래요?”


리리카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마호는 정말 따분한 사람이에요.”


리리카가 마호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진짜 마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등장하며 소리친다.


“오늘 날씨는 맑음.”


겐타가 중얼거렸다.


“미쿠? 낚시하기 딱 좋겠어.”


겐타는 미쿠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쿠가 리리카의 얼굴을

한 번 보며 대답했다.


“아, 여보 오늘은 리리와 있을게요.”


아주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보는 게

겐타는 아까운 모양이다.


“흐음, 또 뺏겨버렸군.”


리리카와 미쿠가 소리 내며 웃었다.

마호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아저씨 언제 나가요?”


“글쎄다, 한 시쯤 갈 생각이야.”


“제가 갈게요, 같이 가요.”


미쿠가 호들갑이다.


“그래 마호, 그러면 되겠어.”


겐타가 큰 소리로 거드름을 피우면 말했다.


“나도 따분한 사람은 질색인데 말이야.”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마호는

머리를 긁적였고 그녀들은

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침 반찬에 놓여질 감자가

간장에 조려지는

달큼한 냄새가 이곳에 가득하다.




모처럼 구둣방이 바쁘다.

유키코는 료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차려내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한국행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지만

축하해 줄 일이라고 생각했다.

코하네의 나라에 대해서 아키라에게

들은 얘기들이 많았지만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아마도 그땐 새겨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키라가 츠키노의 집에서 일을 할 때에

한국인도 그곳에 함께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어떤 재료의 것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었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내용들은 꽤 지혜로웠다.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그날,

아키라가 그들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꼭 살아서 돌아가기만을 바라오.”


코하네는 그땐 그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과연, 살아서 돌아갔을까요?”


아키라의 목소리는 어두웠지만

그녀를 위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그때의 그날처럼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다.

노아가 밖을 내다보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벌써 아이의 웃음소리가

구둣방에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노아의 가족들을 보고 온 지

일주일이 조금 넘은 상태다.


노아의 어머니가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 꽤 오래전 일이다.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병을 이겨내고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급격한 노화는

그것들을 이겨내기에 버거웠다.

그녀는 하느님 곁에 가는 건 두렵지 않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노아는 정말 그녀를 볼 수 없게 될까,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유키코는 노아, 그리고 그 가족들과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시기는 참 잘도 들어맞는다.

코하네의 가족이 한국으로 떠난 후,

그들의 미국행은 결정되어진다.

돌아오는 날은 코하네의 가족처럼

미지수일 것이다.


매일 노아는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로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하루의 끝도 그렇게 마무리된다.

고통을 티 내지 않는 노아의 얼굴이지만

유키코는 알 수 있었다.

이젠 유키코가 노아의 힘이 되어 줄 차례임을

그녀는 다짐하듯, 노아의 표정을 자주 확인했다.


천사 같은 료카의 진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코하네의 몸은

부쩍 살이 붙어 있었다.

노아가 먼저 그들을 반기며 말했다.


“웰컴 웰컴, 어서 오세요.”


어김없이 료카는 노아의 목을

빠르게 감싸 안았다.

놀란 하즈키가 웃으며 말했다.


“어쿠, 료카아아.”


유키코는 앞치마를 빠르게 벗어던지며

코하네와 하즈키에게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 이런 이런 정말 오랜만이야

하즈키 건강은 어때요?”


얼굴을 붉히며 그가 대답했다.


“하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건강해요 하하.”


“그렇게 보이니 다행이에요,

코하네는 살이 올랐는데?”


“유키코는 피부가 많이 탔어요.”


코하네는 료카의 손을 잡고

아키라의 사진이 놓인 곳으로 향한다.

하즈키도 따라 두 손을 모으고

정갈하게 인사했다.

유키코가 다시 앞치마를

허리에 묶으며 말했다.


“아마 아키라가

셋을 볼 때마다 놀랄 거야.”


진하게 우려낸 다시마와 간장 냄새가

그들의 식욕을 자극하는 중이다.

료카는 빠르게 자리를 잡고 앉아 말했다.


“아함, 유키 이모 배고파요.”


유키코가 료카의 코을 쥐며 말했다.


“알았아요 공주님,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료카는 구둣방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친다.


“네에에.”


노아는 역시 료카 옆에 앉아

쉴 새 없는 아이의 질문에 정성스럽게 답한다.

드디어 먹구름은 그들이 구둣방에

들어선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해가 지며 어둡기 시작한 시간,

어둠은 티 내는 비를 더욱 요란하게 만들었다.


노아의 오늘 음악은 변함없이 비틀스다.


♬ Why (can’t you love me again) – The Beatles♪


료카가 기억하는 유키코의

마지막 음식은 스키야키다.

료카는 유키코의 얼굴도 스키야키처럼

기억하며 코하네에게 설명하곤 했다.

아이는 달걀의 노른자와

얇게 썰어져 있는 고기만 보면

유키코라고 말하며

코하네의 추억을 살아나게 했다.


코하네의 가족이 이곳을 떠난 후,

유키코는 미련 없이 구둣방을 떠났다.

물론 아키라를 향해 노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유키코는 마치 정말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구둣방을 향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코하네가 그곳을 떠날 때처럼 말이다.

구둣방은 언젠가 더 아름다운 장소로

변해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생각보다 그들의 떠날 준비는

아주 간단했다.

다만 그곳에 가기 위한 서류들과

통과해야 하는 몇몇 것들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좀 길지만

가족들과의 이별은 단호했고 간단했다.


나오코는 코하네의 속에 숨어 있는

온갖 독함과 고집을 모두 끌어내어

그들을 말렸지만,

그들의 인생에 자신의 것을 덧붙이는 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닫는다.


그날 이후, 나오코는 한 번도 그들에게

가지 말라,라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잘 살아라,라는 말 또한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과 이별하는 나오코의 눈 속은

다른 믿음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코하네는 일사천리 준비를 하는

하즈키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코하네에겐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이

많진 않았지만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쓸 수 있을 정도의 것을 갖고 있었다.

이곳의 생활을 정리하면서

드러난 하즈키의 저축은 비교를 하자면

겐토의 것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것이었다.

코하네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가 왜 이제껏,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잘 알 수 있는 결과였다.

하즈키의 계획은 아마도

코하네를 알고 난 후부터 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떠나기 일주일 전, 미네코를 만났다.

물론 마나츠의 가족들도 함께 있었다.

하즈키가 도쿄로 오기 전 미네코에게

내민 통장보다 더 세련된 색깔을 띠고 있는

통장을 미네코는 그들에게 내밀었다.

하즈키는 당연히 그것을 펼쳐 보지도 않은 채

그녀에게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미네코의 표정은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난, 그때 받았잖니? 너도 그래야 해.”


그때를 생각해 보니 서로의 입장은

바뀐 것이 분명하고 하즈키도 그땐

미네코가 받지 않을 것을 대비해

당연한 말들을 그녀에게 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 하지만…”


미네코는 아직도 하즈키의 말을

잘도 잘라먹으며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럴 줄 알고, 그때보다 더 적단다.”


미네코의 말에 하즈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졌다는 시늉을 한다.

하즈키는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을 한다.


“참, 따뜻해요.”


하즈키의 말을 들은 미네코는

모른 척, 떨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먼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 위로 눈물이 차고 있었다.

하즈키는 처음 미네코와 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 때를 떠올렸다.


희한한 건 그토록 보고 싶지 않았던

미네코의 모습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지금의 감정이 큰 역할을 한 것인지,

처음 보았던 미네코의 모습은

정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지금의 모습이 그

때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하즈키의 변한 모습도 한몫했다.


료카는 그날 유토의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유토의 주소를 몇 번이나 쓴 종이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료카는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며

유토의 귀에 대고 소리 지르듯 말했다.


“자, 봐 유토, 난 아직 주소가 없어,
하지만 내가 편지를 먼저 하면 돼

음, 그러니까 유토는

내 편지를 받으면
꼭 내 주소로 답장해야 되는 거야,

응? 유토 응?”


계속 끝나지 않을 같은 말에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유토는 이츠키의 성격을 닮은 모양이다.

단 한 번도 짜증 없이 료카의 이야기에

꼭,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하는 대답을 반복했다.

그날 밤 그들의 울타리 속 사람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다.


타다요시 집에서 이렇게

따뜻한 날들이 또 있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왜 사람은 이별 앞에 친절해지고

아쉬워지는지 직접 겪어보니 알 법도 했다.

죽음의 이별이 아닌 만남의 기회가

있는 이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기를 타려면 열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유토와 미네코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잠든 료카의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즈키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잔을 코하네에게 권했다.


“아주 많은 모험이 있을 거야,
각오는 하되 당신은

내게 의지하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코하네는 겁먹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럴게요.”


한 모금도 남기지 않은 잔을 내려놓으며

그들은 짧은 입맞춤을 한다.


“하즈키?”


“으응.”


“고마워요.”


“뭐가.”


“솔직히 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그곳을 가겠다,라는 생각을,

감히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갈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
이룰 수 없다 생각했고,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 내일 가는 거예요?”


하즈키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에게 고마워요,
나도 잘 모르는 내 꿈을

당신이 알고 있었어요.”


“코하네 당신이 먼저

내 꿈을 이루게 해 주었잖아.”


“네?”


“내가 당신과 만나

이렇게 살 수 있는 거,
료카 그리고 당신,

이런 삶이 내 꿈이었어
그걸 당신이 이루게 해 준 거야,

그러니 당신을 위해 난 뭐든 할 거야.”


코하네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 하즈키 당신은 정말이지…”


이번에는 코하네가 먼저

그에게 백 미터 달리기 하듯, 달려들어

입을 맞추고 오랫동안 끌어안았다.


코하네의 밤은 짧았고,

급히 떠진 눈은 감을 줄을 모르고

허공을 맴돌았다.

이젠 정말 볼 수 없을 것 같던

마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든 그에게 허락이라도 맡는 것처럼

눈을 찡긋한다.


‘정말, 안녕, 마호.’


료카의 생일이 다가오면

진짜 여섯 살이 되는 한 해의

시작점인 날이다.

나오코는 공항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일부러 자신이

운전대를 잡는다고 겐토에게 말했을 것이다.


쇼는 관심도 없는 료카와

작별 인사하기를 거부했고

보모 카스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선택했다고 한다.

코하네는 쇼를 한 번 더 보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조금 더

특별한 쇼를 료카는 이해했다.


겐토는 료카에게 꼭,

자신을 초대해 달라고

료카의 곰살맞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조르는 척한다.

유머를 잘 아는 료카는

대답을 겐토처럼 했다.


“유토를 먼저 초대할 거예요.”


지지 않을 듯한 표정으로 겐토가 말했다.


“음, 그럼 난 유토와 함께 갈게

그건 괜찮지?”


“흠, 네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헤헷.”


겐토는 그런 아이가 예쁜지

볼을 튕기며 웃었다.

내내 말이 없는 나오코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한마디 거들었다.


“료카, 참 못땠어

가족이 먼저 아니고?”


농담 섞인 말처럼 웃음을 흘려 보지만

그들은 나오코의 말을

농담으로 듣진 않았다.

료카는 나오코만 보면

주눅이 들었지만,

이별을 앞둔 료카의 심정은

꽤 당당해진 모양이다.


“저기 고모… 제게 유토는 가족이에요.”


겐토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큰 소리로 웃었고,

그 소리를 들은 나오코는

눈을 치켜뜨며 운전에 집중하는 척이다.

공항은 왜 그리도 먼지

나오코의 한숨 소리가 반복해서

빠르게 들릴 때마다

코하네는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나오코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다.


공항에 도착한 순간, 아침 해가 꽤 쨍, 하고

비추고 있지만 찬 공기를 직접 맞는 얼굴은

금방 얼어 버리는 추위이다.

하즈키는 료카의 손을 감싸 쥐며

빠르게 공항 안으로 뛰었다.


잠시 들를 곳이지만

나오코는 마치 자신의 아름다움을

헤어짐 앞에서 과시라도 하는 듯,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떼라도 쓰는 듯,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다.

꽤 크고 부푼 점퍼를 입은

코하네의 모습과는 참, 비교되기 십상이다.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붙힌 후,

그들은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차를 기울였다.

이별 앞에서 이상하게 참, 어색한 시간이다.

겐토도 이 시간 앞에서는 얼굴이 어두웠다.

하즈키가 먼저 나오코와

겐토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자식, 고맙긴, 하… 정말 가는구나 하하.”


나오코가 알고 있던 얘기를

한 번 더 확인하려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착하면 바로 생활할 수 있는 거야?”


코하네가 직접 대답한다.


“으응, 나오코.”


나오코가 료카의 코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요, 똑똑한 아가씨를

이제 보기 힘들겠군.”


“자주 연락할 게 나오코,

그리고 쇼에게 내 인사, 꼭 전해 줘
나오코, 정말 고마워.”


코하네가 나오코의 손을 잡았다.

여러 말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언어들이

쥔 손가락에 가득 담겨 있는 느낌이다.

나오코는 코하네를 보지도 않고

소용없는 말을 다시 해 본다.


“내가 꼭, 사막에 가는 기분이 드네 후유.”


코하네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나오코를 꼭 끌어안았다.

나오코는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즈키에게 건넨다.

아마 그건 쇼의 생일 때

찍은 사진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미네코의 입술이

붉게 빛나고 있었고,

겐토의 세 식구의 입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관심 없는 듯 멀찌감치 서 있는

하즈키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는 모습이다.

하즈키가 건너 받은 사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우리, 잊지 마, 하즈키.”


나오코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슬프게 들렸다.

하즈키가 고개를 끄덕거렸고

겐토가 기다란 두 팔로 하즈키를

힘 있고 짧게 끌어안았다.


“잘 살아, 자주 연락 줘.”


“모두 고마워.”


아직 남은 시간을 뒤로하고

나오코는 얼른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인사는 모두 가슴속에

뭔가 감추어 둔 것처럼 답답하기만

한 인사였다.

나오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겐토는 손을 흔들고 있는

료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았다.

나오코는 마치 자신들이 떠나는

사람들처럼 빨리 서둘렀다.

나오코는 공항에서 나와 주

차장에 올 때까지 한 걸음도 쉬지 않았다.

겐토는 말없이 나오코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그들의 비행기가 이륙하는 시간까지

차 안에서 나오코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올려 보니

그들의 것인지 모를 비행기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말도

안 되는 각도로 하늘로 붕, 떠나고 있었다.


그제야, 나오코는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겐토는 그녀를 모른 척했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나오코는 소리 없이

맑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오코의 허벅지 위가

젖은 모습이 눈에 띈다.


나오코는 거의 한 달 내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집 밖을 나가지도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도 않았다.

쇼의 보모 카스미는 일거리가 많은 것보다

나오코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더 힘들다고 말했다.


“미안해요,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카스미는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이었고,

불필요한 감정을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었다.

일에 있어서는 굉장히 완벽한 사람이다.

카스미는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나오코가 꽤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흔히 말해 가족 같은 사이라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세월을

함께하는 중이었고, 겐토 보다 그 누구보다

나오코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유일하게 나오코를 잘 알아도

채근하거나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오코는 카스미가 그만두겠다는

다짐의 말을 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쇼가 중학생이 되었고,

오히려 카스미가 신경 쓸 일은

반으로 줄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나오코는

카스미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자신이 없었다.

하즈키와의 이별보다

카스미의 빈자리가

자신을 더 힘들게 할 것이란 것을 깨닫는다.


“아, 카스미, 제발 갑자기 왜?

일이 힘들다면 일을 좀 나눠 보자.”


카스미는 나오코의 말을 듣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을 생각하다 갑자기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카스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나오코는 고개만 흔들고 있었다.

모두 차려진 음식 앞에

카스미가 먼저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밥, 먹어요.”


나오코는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말며 의아해한다.


“으응? 대체 무슨.”


“나오코, 당신 얼굴을 좀 봐요,
난 괴물 같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젓가락을 들어요, 어서.”

내내 우유 같은 유동식만

억지로 먹었던 나오코다.

나오코는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없이 젓가락을 든 손이 후들거렸다.

카스미는 나오코가 온전하게 젓가락을 들어

입안에 가져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때 정신없이 큐브를 맞추고 있던

쇼가 식탁으로 와서 앉는다.


“카스미? 나도 먹을게.”


카스미는 재빨리 쇼의 것도 챙겨 주며

서로 눈을 마주하고 웃었다.

그렇게 활짝 웃는 카스미는 처음 보는 듯하다.

카스미는 참, 마치 부모처럼

쇼에게만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


하즈키가 떠나고 아주 담대하게 굴던 겐토는

다시 사춘기가 찾아온 것처럼 굴었다.

하지 않던 반찬 투정을 하다가

카스미에게 밥그릇까지 뺏긴 적도 있다.

친구를 잃었다며 주주절거리기도 했고,

귀가도 아주 일러졌다.


그들은 점점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으며

되돌아가기 시작했지만

하즈키의 빈자리는

참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고

가끔 들리는 한국의 소식에

모두는 전화 앞으로 몰려들었고,

웃거나 울거나 인상을 찌푸리며 잔소리하거나,

그들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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