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류

악의 가계도

by 추지원

서문 — 악은 언제나 좋은 이유를 갖고 있다


악은 좀처럼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악은 늘 좋은 이유를 갖고 있다.


“나는 상처가 많아서 그랬어요.”

“잊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그랬어요.”

“누군가는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악은 죄를 자백하는 대신,

자기 상처를 자백한다.

상처는 죄보다 듣기 좋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에는

상처 많다는 이유로 마약을 샀다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잊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더 잊고 싶을 일을 저질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없애놓고,

“잊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을 도려내야 한다고 믿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신의 정의를 대신 집행한다고 믿었다.

그가 만들어낸 종이 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불편한 존재.

문제를 일으키는 자.

제거 요망.”


그리고 어느 아주 평범한 날,

한 교실에서

한 아이의 가슴에

그 라벨이 붙었다.


이 기록은 누구의 몽상인지,

누구의 심문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1장 — 분류된 아이


선생님들이 나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절대로 나를 보지 않는다.


항상 옆을 보거나,

천장을 쳐다보거나,

종이를 넘기면서 말한다.


“쟤 부모님은 왜 병원에 안 데려가실까.”

“쟤도 힘들 텐데 말이야.”

“저 정도 되면 구조적인 문제야.”

“감추지 말고 도움을 줘야 하는 아이지.”


도움을 줘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나를 피하면서 나왔다.


나는 내 이름보다 먼저

“문제”라는 단어를 배웠다.

어릴 때부터였다.

엄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얘가 원래 좀 예민해서요.”


엄마의 미소는

늘 입술까지만 있었다.

눈동자까지 올라가 본 적이 없다.

그 미소는,

발뒤꿈치에 평생 붙어 다니는

값싼 반창고 같았다.

떼내면 아프고,

붙이고 있자니 숨이 막힌다.


선생님들은

조금 다른 종류의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이 널 이해해”라고 말할 때 쓰는 미소.

이해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미소였다.


나는 어른들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은 나를 정리하고 싶어 했으니까,

먼저 내가 그들의 인내심을 정리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나는 중얼거린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안 들리지는 않을 정도로.


“구조적인 문제… 감추면 안 되지…”

“쟤도 힘들 텐데…”

“도움을 줘야 하는 아이지…”


그들의 문장을 되감기 재생하듯 따라 한다.

그러면 거의 빠짐없이

선생님이 묻는다.


“지금 뭐라고 중얼거렸니?”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은 이미 그들이 내 대신 다 했으니까.


그날 아침,

나는 거울 앞에서 셔츠 단추를 잠그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왼쪽 가슴, 주머니 위에

얇은 종이조각이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싸구려 프린트용지였다.

비에 한 번 맞으면

잉크가 흐르고 찢어질 그런 종이.


거기에는

이상한 활자로 몇 줄이 적혀 있었다.


분류: F–4

항목: 지속적 소란 / 자의식 과다

비고: 제거 검토


나는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정직해졌네.


“문제가 있다”고 떠들면서

끝내 문제의 이름은 말해주지 않던 어른들 대신,

누군가가 아주 친절하게

나를 라벨링해 준 것이다.


엄마가 붙였을 리는 없다.

엄마는 종이를 붙이는 대신 말을 붙인다.


“엄마도 힘들어, 알지?”


선생님들이 붙였을 리도 없다.

그들은 라벨 대신 조별활동을 사랑한다.

조별활동은 라벨보다 훨씬 잔인하다.

사람들은 라벨보다

서로를 더 잽싸게 피하니까.


그러면 누가 붙였을까.

아마 어른들의 어른,

선생님의 선생님,

엄마의 엄마 같은 존재일 것이다.

어른들이 책임지고 싶지 않을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주인.


나는 종이를 한 번 눌러보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라벨은

예전부터 붙어 있었다.

이건 그냥

조금 솔직해진 버전일 뿐이다.


교실에 들어가자

선생님이 나를 힐끗 보았다.

가슴에 붙은 종이를 보았는지,

원래 붙어 있던 나를 보았는지,

구별하기 어려운 눈길이었다.


선생님은 잠깐 눈썹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 없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

“네.”

“박○○.”

“네.”

“윤○○.”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대답 대신 중얼거렸다.


“F–4, 출석했습니다.”


옆자리 애가 킥 하고 웃었다.

선생님은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은

어른들이 발명한 최고의 생존술이다.


나는 언젠가

엄마가 우는 날에도

엄마를 못 들은 척한 적이 있다.

그 순간 내가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수업이 시작된 지

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복도에서

이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운동화도, 구두도 아닌 소리.

바닥을 단단하게 누르면서도

리듬이 너무 일정해서

살아있는 사람의 발소리 같지 않았다.


탁, 탁, 탁.


칠판 앞에 선 선생님이

순간 말을 멈췄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이상한 점은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알았다.

사람들이 정말로 겁내는 것은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것”이라는 걸.


끼익—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교복도, 양복도 아닌

애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군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새것이고,

작업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손한 다림선이 잡힌 옷.


얼굴은 선생님들보다 더 평온했다.

선생님들은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대개 이해에 실패한 표정을 짓는다.

이 사람들은

애초에 이해할 필요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맨 앞의 사람이

종이 한 장을 펼쳐 읽었다.


“분류 F–4, 앞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전원이라니, 나밖에 없는데.


그러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복수형이었다.

어른들은 나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복수형을 썼다.


“이런 애들은…”

“이런 아이들은…”


나는 쭉 혼자였는데도

늘 여러 개였다.


통로로 나가는 나를

반 아이들이 슬쩍 보았다가

다시 교과서를 내려다보았다.

눈길은 차가운 창문 닮은 법이다.


나는 일부러 조금 더 크게 중얼거렸다.


“감추지 말고, 도움을 줘야 하는 아이지…”


옆줄 아이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다.

정상이라는 것,

그쪽에 속한 애들이 더 불안할 때가 있다.

정상이라는 말은

그저 “아직 라벨이 붙지 않은 상태”일 뿐이니까.


복도에 나가자

공기가 교실보다 맑았다.

라벨이 붙은 자들만이

숨쉴 수 있는 밀도 같았다.


세 사람 중 하나가 내 가슴의 종이를 확인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동행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니.

나는 거의 감동할 뻔 했다.

어른들은 보통

“지금 당장”이나

“왜 그렇게밖에 못 하니?”를 쓰지,

“부탁드립니다”를 쓰지 않는다.


나는 가방을 챙기지 않았다.

그 안에는

숙제 안 한 사실,

엄마가 억지로 넣어준 간식,

끝이 씹힌 샤프 펜 하나뿐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 어디에도 나를 도와줄 물건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

위에서 희미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 아이도… 참 힘들겠지.”


나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 문장은 언제나 같다.


“저 아이도 힘들겠지.”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은

언제나 이렇다.


그러니까 저 아이를 멀리해야지.”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연민을 말했으니

할 일을 다 했다고 믿는 안도였다.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말도 안 되게 맑았다.

오늘은 나 같은 아이를

어디론가 보내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운동장 끝에

커다란 차가 서 있었다.

수학여행 버스처럼 생겼지만

창문은 안이 보이지 않게

짙게 코팅되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내가 물었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정리되는 곳입니다.”


정리.

엄마가 평생 입에 올리지만

끝내 하지 못하는 것.

선생님들이 매 시간 적어두는

‘학습목표’의 진짜 이름.


드디어 세상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을

나를 가지고 해볼 생각인가 보다.


나는 가슴에 붙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꼭 눌렀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이 라벨은 마음에 든다.

처음으로

나를 정확하게 설명한 문장 같았다.


그때,

누군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인지,

새로운 분류번호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빛이 접히는 소리가 났다.

운동장, 버스, 군복 같은 사람들,

모든 것이 하얗게 뒤엉켰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어디선가

눈을 뜨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확신이 들었다.


2장 — 심문대 위의 남자


그곳은 법정도, 교실도, 병원도 아니었다.


높은 천장과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계단,

가운데에 놓인 의자 하나뿐.


남자는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은 묶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묶인 사람처럼

어깨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존재가 서 있었다.

판사라고 부르기엔 너무 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엔

눈빛이 너무 조용한 사람.


그는 그냥

“심문자”였다.


“당신이 바로

선별관(選別官)이군요.”

심문자가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때

제국의 충직한 관리였다.

사람들을 줄 세우고,

검사하고,

분류하고,

표를 붙이고,

보내는 일을 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라벨들이 있었다.


“노동 가능.”

“노동 불능.”

“교정 가능.”

“제거 요망.”


그는 자신이 정의의 도구라고 믿었다.

세상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누군가는 더러움을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을 제거하면서

자기 손을 씻지 않았다.

자기 손을 신의 손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심문자가 물었다.


“누가 당신에게

이 라벨을 쥐여줬습니까?”


남자는 대답했다.


“세상입니다.”


“세상이요?”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세상은 악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해야 했습니다.”


“악이라.”

심문자가 되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악’이란 무엇입니까?”


남자는 잠시 주저했다가 말했다.


“한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녀는 잊고 싶은 게 많다며

마약을 샀습니다.

문제는, 마약을 살 돈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보험금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심문자는 묻지 않았다.

대신 침묵했다.

그 침묵이

“그리고?”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치웠습니다.

가족들을.

나중에 사람들은

그녀를 인터뷰했습니다.”


남자의 입가에

기묘한 경멸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잊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그는 심문자를 바라보았다.


“들으셨습니까?

악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자기의 죄는 말하지 않고,

자기의 상처만 말합니다.

마치 상처를 가진 자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듯이.”


“그래서 당신은

사람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심문자가 물었다.


“예.”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잊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지우는 자들.

세상이 그런 자들을

그냥 흘려보내도록 놔둔다면,

그건 신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문자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지요?”


남자는 준비된 답변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라벨을 만들었습니다.

불편한 자,

문제를 일으키는 자,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들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거 요망’이라는 문장을 붙였습니다.”


심문자는

남자가 만들어 붙였던 라벨들 중

하나를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낯익은 글씨가 있었다.


분류: F–4

항목: 지속적 소란 / 자의식 과다

비고: 제거 검토


남자의 눈이 커졌다.

“이건…”


“당신이 만든 표본 중 하나지요.”

심문자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이런 아이들을 보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습니까?”


남자는 침을 삼켰다.


“그 애들은…

다른 아이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선생들을 지치게 했고,

부모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조금 덜 태어났거나,

조금 잘못 태어났거나,

조금 지나치게 태어난 존재들은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문자가 묻는다.


“그렇다면

그 여자—

‘잊고 싶은 게 많았다’던 그 여자는

당신 기준으로 무엇이었습니까?”


남자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제거 요망입니다.”


“그리고…”

심문자가 조금 몸을 기울였다.

“당신은?”


…저요?”


“당신은

어떤 라벨이 붙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악을 없애려다

악과 닮아버린 자입니다.”


남자는

처음으로 말을 잃었다.


심문자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또 다른 라벨을 들어 보였다.

이번에는

남자의 이름 대신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항목: 신을 흉내 내려 한 자

비고: 악의 2세대


“신은,”

심문자가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을 당장 도려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악을 방치합니까?”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심문자가 고개를 저었다.


“신은

악을 당장 없애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을 없애려 손을 대는 순간

인간은 신을 흉내 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을 흉내 내는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악이 됩니다.”


남자의 입술이 떨렸다.


“저는…

악을 끊으려 했습니다.”


“당신은,”

심문자가 차분히 말했다,

“악을 끊으려 한 것이 아니라

악의 가계도를 확장시켰습니다.


그 여자 뒤에는

‘상처를 핑계로 한 악’이 있었고,

당신 뒤에는

‘정의를 핑계로 한 악’이 있습니다.


둘 다

결국 같은 집안입니다.

악은 악을 낳습니다.”


심문자는

아이의 라벨과

남자의 라벨을

나란히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정리되어야 할 아이.

하나는

정의를 정리하겠다고 나선 어른.


둘 다

신의 눈에는

당신이 붙인 것보다

훨씬 복잡한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읽을 수 있는 문해력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지요.”


남자는

무너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얀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발자국.

아직 분류가 끝나지 않은 존재의 발소리.


3장 — 깨어나는 아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먼저 보였다.


나는 잠시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운동장도,

하얀 계단도,

선별관도,

심문자도 없었다.


대신

익숙한 얼룩이 있었다.

석고보드 사이로

머리카락처럼 금이 간 천장.

집이었다.


이불 속에서

내 심장이

아직도 F–4처럼 뛰고 있었다.


문이 두드려졌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엄마 목소리였다.


엄마는 문을 벌컥 열지 않는다.

항상 문 쪽에 대고만 말한다.

마치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식인지,

다른 생명체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일어났어.”

나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슴이 이상했다.

손바닥으로 만져보았다.


종이는 없었다.

라벨도 없었다.


그런데

없는 것을 더듬는 손끝에

어딘가

잉크 번진 촉감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나갔다.

엄마는 늘 그렇듯

예의 바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예의를 갖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어제 또 전화 왔더라.”

엄마가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너 수업 시간에 자꾸 중얼거린다며.


엄마도 힘들어, 알지?”


엄마도 힘들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면책 조항.


“나도 힘들어.”

나는 말했다.

“나도 힘들어서 그래.”


엄마는 잠깐 나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럴수록

더 똑바로 해야지.”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제 꿈속에서

심문대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악을 끊으려다가

악의 2세대 판정을 받았다.


엄마는

상처를 끊고 싶어하지만

한 번도 자기 상처를

끝까지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나는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중얼거렸다.


“악은 악을 낳는다더라.”


“뭐라고?”

엄마가 물었다.


“아니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은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학교 가는 길에

가슴이 계속 근질거렸다.


등굣길 계단을 오르다가

나는 셔츠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제의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다.


분류: F–4

항목: 지속적 소란 / 자의식 과다

비고: 제거 검토


나는 가슴팍 위에

손가락으로 상상의 네모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다른 글씨를 써넣는 흉내를 냈다.


항목: 아직 끝나지 않은 존재

비고: 보류


교실 문 앞에 서자

안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떠들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또 나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쟤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어.


나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잠깐 멈췄다.

문을 열기 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누구의 악에서 태어난 걸까.


상처를 핑계로 한 악인지,

정의를 핑계로 한 악인지,

아니면

그 둘이 겹쳐 만든

어중간한 그림자인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

사람이 읽을 수 없는

신의 필적일 것이다.


나는 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왔니.”

나는 대답했다.

“네. F–4…

아니, 그냥

저 왔어요.”


그리고 자리로 걸어가면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정리는 나중에 해요.

지금은 아직,

보류로 두자고요.”


내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악은 악을 낳는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늦게 태어나 보고 싶었다.

악과 악 사이에서

다음 세대가 아니라

잠시 멈추는 세대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종이 울렸다.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은 오늘의 학습목표를 적었다.


“문장의 목적을 이해한다.”


나는 칠판을 보다가

살짝 웃음이 났다.


문장의 목적이라…

라벨의 목적부터

먼저 이해해야 할 텐데.


나는 아무 말 없이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첫 줄에

작게 써 넣었다.


“악은 악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명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문장을

숙제로 내주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적었다.


어쩌면 언젠가,

누가 대신 읽어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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