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번
1.
뒤에서 강아지를 안고 지켜보던 나도 사실 놀랐다.
아이 그… 안 보인다고 뒷꼭대기부터 헤어드라이어를 대고 말리다니.
머리는 군데군데 형편없이 타들어가 있었다.
명색이 대학교수라 천만다행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형편없는 날라리머리였다.
길긴 또 왜 그렇게 길어.
뒷꼭대기에 눈이 없는 경희는
“머리 계속 기를까요? 좀 자를까요?”
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싶을 미용사 보기가 민망해서
내가 끼어들었다.
“야. 머리끝 다 죽었어. 기르든지 말든지, 일단 다듬어.
햇볕 강해서 그런가? 완전 수분기 없이 말랐어.”
(경희는 텍사스에서 온 지 며칠 안 된 상태였다.)
한국 코드를 못 맞추는 건지
강의실에서만 똑똑한 건지
내 친구는 갈피를 못 잡고
이 말했다 저 말했다.
“그래서… 자를까요? 말까요?”
그 말이 끝나자, 미용사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손님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돈 안 되는 커트만 하고 우물쭈물하는 손님에 질린 미용사는
한쪽 다리에 몸무게를 실었다.
“그냥 잘라보지 뭐.”
경희의 그 천진한 대답은
자기 머리 상태도 파악 못한 채 선심 쓰는 사람처럼 들렸다.
싹둑싹둑.
투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내 속이 다 시원해졌다.
“어머 예쁘다, 야. 진작 자를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명쾌함에
내 진심이 불쑥 나왔다.
그리고 그때였다.
미용사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손님은 이 손님 진짜 좋아하나 봐요.
뭐 해도 예쁘다 그러네. 호호.”
나는 좀 뒷북이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그랬다.
누가 욕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고.
그러다 집에 와서 혼자 씩씩댄다고.
그래서인지 미용사의 말이 신기했다.
뭔가 촘촘한 뜻이 숨어 있는 말 같았지만
나는 그냥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그럼 친군데 좋지 안 좋아요?”
순간, 미용사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앞머리 다듬기에만 집중했다.
방금 전까지의 그 은근한 웃음,
그 얄따란 비꼼의 기운이
조용히 접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야
눈치라는 감각이 뒤늦게 켜진 내 친구도
수다를 멈추고 거울 속 자기 머리만 바라보았다.
서울에 와서는 한 번도 안 쓰던
‘교수님 다운 진지함’으로.
제일 고생한 건 우리 강아지다.
품에서 내려놓자마자 콩콩콩콩, 앞장서서 신났다.
“야. 아까 내가 뭐 잘못했냐? 미용사 왜 화났지?”
별일 아니라는 듯 경희가 묻는다.
얘는 예전부터 조금 소년 같았다.
불필요한 상황의 공기 따위 안 읽어버린다.
따로 뭐 중요한 게 있는 사람처럼.
“으유, 나쁜 여자. 비꼬는 거지 뭐.
돈 안 되는 커트만 하고,
친구에 강아지까지 왔지.
머리 상태는 엉망인데 영양도 안 하고, 파마도 안 하고.
이래저래 심술 났나 보지.”
경희는 그 말에 킥, 하고 웃었다.
“야, 화날 만했겠다. ㅎㅎㅎ
근데 네가 친군데 안 좋냐고 말해준 거, 그거 있잖아.
그 말 듣고 기분 좋더라.”
어둑해진 밤길.
경희는 아주 신이 났다.
발걸음마저 경쾌해서
통닭집 간판을 찾는 모습이 꼭 소풍 나온 아이 같았다.
저녁엔 튀긴 통닭에 맥주란다.
2.
delayed anger
미루어진 분노
경희가 집에 돌아가고 나서,
내 주특기인 지연된 분노가 문을 두드렸다.
열어줄까 말까.
인정한다.
나는 한심하게도 그 유혹의 문을
대부분 열어주는 편이다.
그래. 일반화시키지 말자.
한국 사람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몇몇 사람들”이라고 범위를 정해 말하겠다.
아까 그 미용사와 같은 몇몇 사람들은
비꼬는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무언가를 능숙하게 한다는 건
이미 그 방식이 몸에 익었다는 뜻이다.
습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몇몇 사람들 중 또 일부는
자신의 이런 언어 패턴을
스마트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곧이곧대로 말하는 사람들을
“사회성이 없다”거나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식으로 평가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는 것,
속셈 없이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곱게 산 사람의 특권이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는 걸까.
그러고 보니 며칠째
내 신경을 가만히 긁는 말이 있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아.”
쿨함이 스르르 번지는 말투였다.
환한 미소와 함께 건네졌고,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어른스러운 태도처럼 들렸다.
나도 웃으며 들어주었지만
그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웅크렸다.
그 말은 사실,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건조한 목소리 뒤에 숨어 있는 슬픔을
가슴이 먼저 읽어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어떤 말이 떠올랐다.
“미워도 다시 한번.”
어느 영화감독이었을까.
가장 좋아하는 말이 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가 평안하고 단정한 얼굴로
그 표현을 내놓았다.
그때, 듣는 나도
말없이 따뜻해졌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들을 만난다.
많은 연인을 만나는 사람도 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는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어
이렇게까지 회자되는 말이 되었을까.
그 말을 듣고 누군가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굳건하고,
사람 따위에 무너지지 않는 존재라고
그렇게 여겼을까.
그렇다면 왜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상대가 나를 멋지다고 생각해야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를 멋지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은 ‘지는 것’이라고 믿어서?
억지 고집이지 않나.
그런 태도는.
정말 멋진 사람은,
상대가 떠날 때 그 이유가
꼭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나의 ‘멋지지 않은 면’ 때문이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내가 너무 빛났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성실하게 대했다는 사실만 남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이유는
굳이 알 필요가 없지 않을까.
오는 사람 안 막는다는 말도
어딘가 맞지 않았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다.
호감을 품고,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서 다가온다.
반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다면?
가령 연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때도 ‘오는 사람이니 안 막는다’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나와 세계관을,
삶의 일부를,
가치관을 나눌 사람은
단지 다가왔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일 대상이 아니다.
그걸 무조건 허용하는 태도는
쿨함이 아니라
쿨을 흉내 내는 빈곤이다.
진짜 풍족한 사람이라면
그런 방식을
자기 인생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절대로 했다고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바보 같은 논리다.
사람을 더 화나게 만드는
슬픈 고집이다.
대부분의 일은
진심을 다하면 쉽게 해결된다.
해결 여부를 떠나서도,
잘못한 일에는 미안한 마음이
울컥 올라오는 것이 순리이다.
순리를 따라 흘러온 사람은 곱다.
그래서 “도덕책 놀이 하느냐”며
놀림을 받을지라도
누군가는 알아본다.
저 사람, 곱다고.
고와서 부럽다고.
3.
핸드폰이 발달하기 전,
내가 어릴 때는
“누구야~ 노올자!” 하고 친구를 불렀다.
아…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운지.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크게 숨을 내쉰다.
실컷 놀다 보면
싸움이 나기도 했다.
씩씩대다가도
저녁밥 한 끼 먹고 나면 금세 잊었다.
혹은 다음 날 아침까지 마음에 남아 있더라도,
심심함은 언제나 고집보다 크게 출렁였다.
우리는 매일을 성실하게
“누구야~ 노올자~”로 쌓아왔고
그 모든 날들이 이어져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이제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태도가
왜 슬픈지 말해보자.
이 말은 사실
움츠린 아이의 권력놀이에 가깝다.
지면 안 되고,
인정받지 못하면 상대를 지워버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억지 ‘인정’의 한 방식이다.
반대로 “미워도 다시 한번”은
정서적 회복탄력성(Emotional Resilience)을 지닌
고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다.
충돌이나 부정적 감정을
빠르게 회복하고
관계를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은
많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에게만
자연스럽게 생기는
따뜻한 이름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비롯해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들과의 애착이 안정적으로 형성된 아이들은
관계가 잠깐 흔들려도 이렇게 생각한다.
“이 관계는 안전하다.
싸웠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엄마, 혹은 친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안정 애착(secure attachment)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회복이 빠른 사람들은
정서 조절 능력(Emotional Regulation) 또한 높다.
그들은 감정의 강도를 낮추고
감정에서 벗어나는 속도가 빠르다.
다시 말하면,
감정을 다시 ‘사회적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자연스럽게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연재야, 노올자~”
“경수야, 노올자~”
얘들아, 내 이름도 불러줘.
미워도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러서 놀자고 초대해 줘.
우리 다시 실컷 놀고,
막 싸우기도 하고,
다음날 아침 담 너머로 또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