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실존 사이에서
마를린 먼로는 20세기 대중문화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녀의 얼굴은 컵, 셔츠, 벽화, 영화 포스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세대에게 회자된다. 하지만 이 익숙한 이름과 얼굴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종종 망각된다. 먼로는 태어날 때부터 유명했던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녀가 상징하게 된 '금발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는 우연이나 본능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한 사회적 생산물이었다. 그녀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그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떻게 그녀의 실존을 밀어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노르마 진에서 마를린 먼로까지
1926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노르마 진 모턴슨이 태어났다. 어린 노르마는 안정된 가족이 무엇인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어머니 글래디스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노르마는 친척과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자랐다. 학창 시절 그녀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고, 종종 외모보다 지능을 더 높이 평가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1945년, 군수 공장에서 일하던 중 군용 홍보 사진을 찍으러 온 군사진 기자 데이비드 코넬리의 카메라에 그녀가 포착된다. 이 계기로 모델 일을 시작한 그녀는 빠르게 주목을 받았다. 모델 시절부터 그녀는 스스로의 외모를 재창조하기 시작했다. 원래 갈색이던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카메라가 좋아하는 특정 표정을 연습했으며, 걸음걸이까지 바꾸었다. 이 변화는 단지 외양의 조정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는 훈련이기도 했다.
그녀가 '마를린 먼로'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20세기 폭스와 계약을 맺으면서부터였다. 이 이름은 그녀의 외할머니 이름 '마를린'과 1930년대 배우 마이너 먼로의 성을 조합해 만들어졌다. 이 시기부터 스튜디오는 그녀를 하나의 상품으로 기획했다. 금발, 섹시, 천진난만한 표정, 얇은 목소리, 짧은 문장—이 모든 요소는 전략적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특히 그녀가 '섹스 심벌'로 자리매김한 과정은 영화, 마케팅, 언론이 서로 얽혀 만들어낸 문화적 현상이었다.
1953년작 나이아가라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그리고 7년만의 외출은 이러한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준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그녀는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를 부르며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욕망의 시각화'로 회자된다. 여기서 그녀는 남성의 시선을 유쾌하게 유도하는 동시에, 그 시선을 거울삼아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금발의 바보 같은 여성이라는 클리셰는 이 장면에서 절정에 달했고, 이후 그녀는 이 이미지로 수없이 소비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마를린은 이 이미지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녀는 철학과 문학을 좋아했고, 도스토예프스키와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인터뷰에서는 늘 자신이 진지한 배우로 평가받고 싶다고 말했지만, 언론은 그녀의 외모와 연애사에만 집중했다. 이는 그녀가 연기력과 내면을 갈망할수록 외부 세계가 그것을 무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1955년, 그녀는 뉴욕으로 떠나 액터스 스튜디오에 등록했다. 메소드 연기를 배우기 위해서였고, 스스로도 연기력에 대한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 했다. 이 무렵 그녀는 자신의 제작사도 설립하며 기존 스튜디오 시스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여성 스타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녀가 자신이 설정된 이미지에만 갇히지 않으려 했다는 중요한 단서다.
그녀의 사생활은 늘 대중의 관심사였다.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은 9개월 만에 끝났고, 이후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그녀가 좀 더 지적인 관계를 원했다는 신호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녀가 추구하던 진정성 있는 삶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밀러는 후에 그녀를 두고 '자기 고통에 너무 몰입된 사람'이라고 회고했는데, 이 말은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신과 치료, 수면 장애, 약물 의존은 그녀의 삶을 점점 갉아먹었다. 영화 현장에서의 반복되는 지각과 대사 암기 실패는 언론의 비난을 불러왔고, 스튜디오는 그녀를 다시 통제하려 했다. 점점 그녀의 삶은 이미지와 현실이 충돌하는 투쟁의 장이 되었다.
1962년 8월, 그녀는 LA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사인은 바비튜레이트 과다복용이었다. 당시 그녀는 존 F. 케네디 및 로버트 케네디와의 관계로 인해 음모론의 중심에 있었고, 이 죽음 역시 지금까지도 다양한 추측을 낳는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죽을 때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마를린 먼로라는 문화의 거울
마를린 먼로는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욕망을 투사했는지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녀는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상업적 이미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시에 자신이 인간으로서 이해받기를 바랐다. 그녀가 금발로 머리를 염색하고, 천진한 눈웃음을 연습하고, 육체적 매력을 상품화했을 때 그 선택은 자발성과 타율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녀의 삶은 할리우드의 명암을 압축한다. 스타가 되는 일은 곧 타인의 욕망을 연기하는 일이었고,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이 외부의 시선에 의해 결정될 때, 주체는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먼로는 수백 개의 기사와 수천 개의 플래시 속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갈망했지만 그 갈망은 늘 이미지에 가려졌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그저 유행을 탔던 스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생애가 우리가 원하는 세계와 우리가 외면하는 진실을 동시에 비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