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날들의 온기

22부

by 김대희

어쩌면 사랑은 내가 모르는 나


오래된 서랍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잊었던 계절의 온도를 다시 느꼈다.

인사동의 가을, 노란 은행잎이 발밑에 수복이 쌓이던

그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삐걱거리는 나뭇가지 소리, 콧속을 간지럽히던

향긋한 흙내음, 그리고 따스한 햇살,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풍경은 마치 처음부터 온전했던 나의 일부였던

것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세상의 좁은 시선과 편견이 드리운 그림자는

결국 그 풍경을 지워버렸다. 우리는 함께 걷던 길을

멈춰 서야 했고,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세상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정지해 있었다.

나는 움직였지만, 주변의 모든 것은 마치 흑백영화처럼

느리고 정적으로만 느껴졌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나는 혼자였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가장 여린 마음을

잃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의 실패 앞에서,

나는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긴 터널 속에서,

타인의 사랑이 아닌 나 자신의 부재로 인한 아파했음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리는

순간부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버려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은 길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타인의 사랑에 기대지 않고도,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을.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작은 세계를 다시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차가운 벽을 향했던

시선을 창밖의 풍경으로 돌렸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켜고, 빗물에 젖은

풀잎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길가에 피어난 들꽃의

생명력을 사랑했다. 그렇게 내면의 틈새로 스며드는

작은 온기들이 차갑게 얼어붙었던 나를 조금씩

녹여주었다.

과거의 사랑이 남긴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의 표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깊이 사랑했고, 얼마나 치열하게

아파했는지를 증명하는 나만의 귀한 훈장이 되었다.


새로운 사랑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녹여버릴 것 같은 따뜻한 품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내가 혼자였던 지난달들의 모든 외로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나의 상처와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고, 내가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흔적까지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길 잃은 배가 닿는 항구와 같았다.

그녀를 통해 나는 내가 모르는 내 안의 강인함과

따뜻함을 발견했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이 나를

완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나 스스로를 다시 보게 되는

것임을.


그렇게 나는 더 이상 홀로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겸허히 설 줄

알게 되었고, 발자국마다 스며드는 지난 기억들마저

감사히 품을 줄 아는 내가 되었다. 홀로 걷던 날들의

끝에,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되어 사랑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홀로 걷는 날들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