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이 뛴 지도 어느덧 10년이다.
그 사이 팀은 여러 번 재편됐다.
감독이 수차례 교체됐고,
핵심 선수들이 떠나갔다.
포체티노부터 무리뉴, 콘테,
그리고 이제 포스테코글루에 이르기까지
토트넘은 늘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2019년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이라는
한 시절의 정점을 찍은 후
클럽은 다시 기로에 섰다.
케인은 떠났고, 알리, 에릭센, 요리스 등
상징적인 인물들도 더는 없다.
그러나 손흥민은 남았다.
손흥민은 매해 이적설에 이름이 오르내렸고
실제로 다른 선택지도 존재했지만
토트넘에서 계속 뛰었다.
성적이 뚜렷하지 않았던 시즌에도
팀 내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잔류는 상징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그리고 마침내 손흥민은 이번 시즌
팀의 주장으로서 유로파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토트넘 입단 이후 첫 번째 우승이었다.
동시에 팀 역사상 17년 만의 트로피이기도 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그는 남아 있었고
결국 남은 사람이 마지막에 무언가를 증명해 냈다.
이러한 선택은 흔치 않다.
오늘날의 스포츠는 개인 역량과 커리어의
극대화를 당연시한다.
더 강한 팀, 더 좋은 연봉, 더 많은 주목.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한 팀에 머문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받기 쉽다.
그러나 손흥민은 타산이 아닌
책임의 언어로 경력을 설계했다.
팀이 흔들릴수록 중심을 지켰고
실리보다는 소속감을 우선했다.
일종의 낭만이다.
효율성과 최적화가 모든 영역에 침투한
지금 이 시대, 낭만은 종종 구식이라 치부된다.
결과 중심의 경쟁 구도에서
여유, 유대, 의미 같은 단어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된다.
손흥민의 선택은 개인의 충성심이나
미담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삶의 태도에 대한 한 가지 실천이다.
빠르게 결정하고, 정확히 계산하고,
즉각적인 보상을 추구하는 시스템에서
‘머무는 일’은 종종 불리하고, 종종 느리며,
때로는 손해로 끝난다.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도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 무언가에 여전히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 자체가
이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낭만의 형태다.
남아 있던 사람이 트로피를 들었다.
손흥민의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결과가 아니다.
이익을 따지지 않고 무언가를 지켜온
한 사람의 서사이며,
그 자체로 낭만이 실용의 세계에서
어떤 자리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낭만은 정답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여백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그런 장면 앞에서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춘다.
모든 것이 목적화되는 시대에
목적 없이 머무는 선택.
그 비효율에서만 생기는 감정과 관계가 있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낭만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속도와 기능이 아닌,
존재로 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