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비판을 과연 들을 준비가 되었을까
2015년 무렵부터 대한민국에는 페미니즘 광풍이 불어닥쳤다. 비슷한 시기에 강남역 살인사건, 게임성우 교체 사건, 메갈리아나 워마드를 페미니즘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이슈들이 쏟아져 일어났다.
그 시기에 나는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똑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데에서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던 그 시절 조차도 페미니스트들의 운동 방식에는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네거티브적인 전략으로 페미니즘을 어필하는가에 대해 나는 강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내가 들은 답변은 이거였다.
"페미니즘은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노이즈 마켓팅도 서슴지 않는다."
즉,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 노이즈마켓팅은 사람들의 이목을 충분히 끈 이후에도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페미니즘의 네거티브 전략은, 사실, 전략이라기 보다는 PTSD,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장애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논리나 전략에서 벗어나, 감정적으로 고양된, 자학적인 상태를 오래토록 지속하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10년 전 당시, 나의 주장은 간단했다. 남성들에게 여성의 입장을 설명하고 공감을 받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지, 남성들을 적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공격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상식적이고 온건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지 않은가?
그러나 여성운동은 내 바람과는 완전히 반대로 진행되었다. 여성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공격하고, 배제하고자 하였다. 지극히 일부 남성커뮤니티에서 행해진 여성혐오에 대해 미러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범혐오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그것은 '잘못된 페미니즘은 없다'라는 구호 아래에 모두 정식 페미니즘 안에 편입되었다. 현재 메갈리아, 워마드라는 용어 자체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흡수된 것과 완벽히 일치하는 흐름이다. 그리고는 모든 여성 불편사항을 '여성혐오'로 명명하며 피해자 대 가해자 구도로 남성을 악마화함과 동시에 무차별 공격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큰 페미니즘의 패착이 있다.
1. 여성 스스로 여성의 강점이라고 말하는 '공감'이라는 무기를 두고, 남성들이 잘하는 '공격'이라는 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남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공격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누가 더 공격을 잘 할 수 있을까. 남자의 무기를 선택하고 남자에게 대항하는 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오히려 여성들 스스로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공감'을 무기로 삼았다면 이 싸움은 애저녁에 끝났을지 모른다. 애초에 남성들은 여성들과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해하고 싶어했고, 져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부당한 공격을 당하는 남자는 절대 불의에 무릎 꿇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몽골군에 저항하듯, 일제에 저항하듯, 한국 남성은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부당하게 남성을 공격했다. 공격대상은 남성이 아니라 불공정성이 되었어야 했고, 남성은 이를 타파할 동료가 되었어야 했다. 햇님이 구름을 이긴 것처럼, 따뜻함을 사용해서 싸우지 않고 이겼어야 했다. 그게 여성의 최대 무기 아니던가.
중요한 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이런 반론을 펴는 여성주의자가 있을 수 있다. 공격 전술을 펴든, 공감 전술을 펴든, 여성이 옳은 소리를 하면 옳은 건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건 남성들이 쪼잔해서다. 뭐 이런 식의 주장이 있다고 한다면, 먼저, 여성들이 취한 방식 그대로 남성들이 했다면, 여성들이 귀를 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을까? 실제로 여성들은 듣지 않았다. 남성도 마찬가지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의 말을 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소통전략에 있어서 완전히 빵점이었다는 반증밖에 되지 않는 거다. 게다가, 남성이 어떤 지점에 대해 여성의 입장을 인정을 했다고 치자, 그럼 이번에는 남성의 주장도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니냐는 거다. 실제로 남성들은 여성들의 군가산점 폐지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해서 결국 군가산점제는 폐지가 되었고, 공공기관에서의 남녀선발비율도 동등한 데에 잠정적으로 동의를 해줬다. 실제로 이게 현실에서 집행되고 있다는 거는 절대 무시 할 수 없는 잠정적 동의의 반증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과연 남성들의 고충과 아픔에 대해 인정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결국 여성주의자들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남성들은 들었고, 여성들은 듣지 않았다.
2. 여성과 남성은 결국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이다. 서로를 배제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전쟁을 통해 어느 한 쪽을 지배하고 피지배 당하는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구도이다. 현대의 남성들도 그걸 원하지 않는다. 많은 동시대 남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부장제를 포기하는 것이 그 예이다. 80년대 이후 태어난 MZ세대들이 대부분 가부장제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과연 MZ세대 남성들이 '여자가 감히' 라든지,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라든지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부 간 합의된 농담인 경우가 99%이다. 남성들은 이미 기득권을 포기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운동은 전쟁과도 같은 방식을 취함으로써 공존을 포기하고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와 어느 한 쪽의 완전한 패배를 전제로 프레임을 짜버렸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전쟁구도에서 과연 취약할까? 역시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남성은 DNA에 언제든지 전쟁에 뛰쳐나가 싸울 마음이 새겨져 있는 종족이다.
3. 폭력을 반대한다면서 폭력적 방법을, 차별을 반대한다면서 차별적 방법을 동원하였으며, 결국 페미니즘이 원하는 이상향이 '평등'이 아니라 '여성독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도록 만들었다. 평등을 원한다고 해서 진정한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방식으로 여성들은 응수했다. 나라면 상대방이 진정한 평등을 제시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책임과 의무를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뷔페니즘이라는 조롱을 받는 이유이다.
4. 과정에서의 불투명성과 독선적이고 독재적인 방식도 문제이다. 페미니즘 내부적으로 어떠한 자성의 목소리,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일종의 사이비종교와도 같은 자기검열이 행하여졌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게다가 남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철저하게 남성을 배제하는 방식 또한 전혀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방식이라는 것도 문제이다. 결국 고인물이 썩어버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페미니즘은 썩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5. 세계는 민주주의의 원리, 즉, 소통권력이라고도 불리우는 다수의 연대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남성의 숫자를 과연 여성이 압도할 수가 있을까? 남성을 적으로 돌리고 전면전을 선포하는 순간 모든 힘 대 힘의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단순히 제도적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연대하는 힘에서 과연 여성이 남성을 압도 할 만큼 숫자가 큰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냥 잠깐만 생각해봐도 남성 숫자가 더 많거나 비등할 거라는 짐작이 가지 않는가? 여성이 절대 이길 수 없는 방식으로 싸움을 건 것이다. 숫자로는 남성도 여성도 서로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마치 숫자로 남자를 이길 수라도 있다는 듯이 연대를 외치고, 남성을 적대시했다.
6. 남성을 설득하는 방식에서 실패하였다. 물론 그들은 설득이 아니라 공격을 택했지만, 설득에서도 실패했다. 이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전혀 남성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남녀문제의 토론장은 언제나 여성주의자의 말자르기, 논점흐리기로 점철되어 있으며, 남자 어른에게 떼를 쓰는 여자아이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수준 낮은 행태를 수도 없이 많이 보여주었다.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남성중심의 체제를 평등 내지는 여성중심 체제로 옮기는 것일텐데, 그 과정에서 남성을 설득하는 데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은 이유와 전략, 과정과 당위성, 모든 것을 막론하고 그저 결과적으로 싸움 그 자체에 진 거나 다름없다. 원하는 걸 절대 얻어낼 수 없게 되었다.
7. 결국 페미니즘은 정책적이거나, 전략적이라기 보다는 구호 그 자체가 되어서는 분노표출의 수단밖에 되지 못하였다. 여성들의 PTSD적이고 발작적인 분노표출의 장, 그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름이 없어진 것이다. 논리적인 어떤 주장도, 방향도 없는, 그냥 레토릭에 불과한, 허무한 여성들의 모임. 그게 페미니즘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기 다 쓰지도 못할 이 수많은 페미니즘의 잘못과 패착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이 '부채의식'에 의해, 혹은, 진보적 믿음에 의해 페미니즘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었다는 것이다. 언발에 오줌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안되는 이 행태들이 결국은 남성들의 분노를 더욱 촉발하였고, 남녀갈등은 더더욱 깊어가기만 하였다.
결국 10년이 넘는 싸움은 끝 간 데를 모르고 깊어졌으며, 최근에 와서는 소강상태에 돌입하였다지만, 잠정적으로 이 싸움은 여성들의 패배나 다름 없다고 나는 보고 있다. 페미니즘이 그토록 강도높게 남성을 공격해서 얻어낸 것이 무엇인가. 서울시 유아차 마라톤? 몇 몇 공공지원정책에서의 여성우대? 공공일자리에서 여성을 좀 더 뽑아주는 거? 그거 말고 뭐 생각나는 게 하나라도 있나? 물론 그것도 페미니즘의 성과이긴 하다. 그러나 그걸 보고 페미니즘의 승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여성들이 잃어버린 걸 생각하면 오히려 패배했다고 봐야 하는 게 현실적이다.
1. 남성들은 여성의 고충을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하게 되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이건 페미니즘이 원하는 이상향과는 반대되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은 실패했다. 오히려 2015년보다 상황은 여성들에게 불리해졌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다. 전혀 여성들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
2. 만약 남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공감을 얻는 방식으로 운동을 했다는 전제로 생각해 봤을 때에 비교하여 기회비용이 너무나 크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기꺼이 내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반대의 상태가 되어 있다. 오히려 가부장제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더 늘어났을 일이다. 레드필 이론이 성행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여성들에 대한 불신만 더 높아지고, 심지어는 여성들의 논리력에 대한 의구심 마저 남성들 사이에는 더 많이 퍼지게 되었다. 여성은 확실히 논리보다 감정이 앞선다는 생각을 더더욱 굳히게 된 남성들이 많아졌을 터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남성들은 오히려 자기 것을 여성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다. 여성은 이전에 남성에게 쉽게 얻어갔던 것들도 이제는 얻기 힘들어졌다. 햇볕정책에서 배움을 얻지 못한 페미니즘의 패착이다. 여성이 왜 고개를 숙여야 해? 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전략적으로 여성이고 남성이고 때에 따라서는 고개를 숙일 수도 있고, 주고 받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페미니즘은 전혀 그런 것 없이 뻣뻣한 무차별 공격만 행했고, 결과적으로 얻어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있던 것도 빼앗길 판. 완전한 패배다.
3. 남녀갈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출산율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들어갔다. 여성만의 패배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패배가 되어버렸다. 페미니즘이 멱살 잡고 대한민국 전체를 지하로 끌어내린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서로 사랑해도 모자랄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불신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이보다 큰 사회적 손실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사탄이 와서 박수 칠 일을 페미니즘이 해내고야 말았다. 서로를 혐오하고 불신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남성에게 이해와 공감을 구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해도 이렇게 출산율이 나락을 갔을까? 전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남녀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계기가 되어서 결혼율이나 출산율이 급등했을 수도 있다.
결국은 페미니즘은 완전히 실패했다.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도 얻어내지 못했고, 남성들의 공감이나 이해를 얻지도 못했고, 오히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던 협력적인 남성들 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으며, 사회 전체에 비용을 증가시켰다. 전면적인 실패인 것이다.
여성들에게 정말 충심을 담아 직언을 하자면, 여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근원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지, 무슨 열매를 조금 더 양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리더들이 너무 근시안적으로 여성일자리, 여성소득 이런 거에 자꾸 집착하는데,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남성들이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들이 남성을 이해해야만이 독박육아니 독박외벌이ATM이니 이런 말들이 사라지고 서로 양해하고 정치적으로 답을 모색할 여지라도 생길 것이 아닌가. 그러지 않고 남성을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적과 협상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성들 스스로 분노를 표출하고, PTSD적 발작을 벌여도 좋다. 다만, 그게 어째서 남성을 적으로 돌리는 방식이었어야만 하는가 이다. 얼마든지 남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진행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면, 페미니즘은 싸우지 않고 승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놓고 싸우는 길을 택했고, 패배했다. 승자도 없고 상처 뿐인 싸움에서 누구도 기뻐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들이 같은 여성 친구들에게 자기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또 상대의 아픔을 듣는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남자라서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남자에게 6.9센치니, 관음충이니, 관음유충이니 하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 아픔을 표현하고 상대방 아픔을 듣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여성들이 아픔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또 상대방 아픔을 건강하게 경청하는 것을 절대 모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PTSD가 발생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이나 마음공부, 혹은 종교나 철학의 힘을 빌리는 것도 방법이다. 이미 페미니즘의 PTSD는 상식선을 아득히 멀리 넘어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조롱이 아니라 충언이다. 진짜 당신들은 일종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런 식의(6.9센치니, 관음충이니, 관음유충이니) 분노표출은 정상이 아니다.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이 대학논문에 저런 글을 쓰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교양인 대 교양인으로, 논리와 위로가 조화를 이루는 대화를 할 준비가 되면, 그 때 페미니즘은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상처를 더 건들이고, 덧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해주는 방식으로 프레임이 전환되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