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연락을 받았을 때 사실은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A와 K가 사귀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이제는 그냥 그 둘과 술을 마시는 게 영 어색할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K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빠, 나 보러 진짜 안 올 거야?”
“응?.. 어.. 스케줄 다시 한 번 조정해 볼게”
K까지 나서니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초대하려는 거지? 정말 얘들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던 건가? 그냥 단지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보자고 한 건가?”
이들의 속셈을 알 수 없어 C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C는 가지 않는 게 왠지 좋을 것 같다고 일러주었다. 이들이 사귀는지는 여전히 반반이나 확실한 건 내가 거기에 가는 것이 나 자신에게 도움 되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좀 쉽게 말해 보라고 했다.
“내가 봤을 때 그 자리가 절대 그냥 모이는 자리는 아닐 거야. 그럼 최악은 둘이 사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는 건데, 형이 그 장면을 감당할 수 있어? 그러니까 가지 말라는 거야. 그냥 간접적으로만 상황을 파악하고 최악을 직접 마주하지 말라는 거지”
C의 말에 나는 오기가 생겨 눈으로 직접 상황을 목격하고 싶었다. C가 분명 조금은 잘못 짚은 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둘 다 내가 가장 아껴하고 좋아했던 동생들이었는데 배신을 해도 이렇게 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고집을 부려 K의 집에 도착했다. 여러 병의 술과 마실 것을 한 아름 짊어진 채 그녀의 문 앞에 들어섰다.
상황을 파악한 후 A와 K는 나에게 사귄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도무지 어찌해야 줄 모르는 이 현실에서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축하라는 말은 차마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얼마 되지 않았다는 그들의 말에 정말 하늘이 노래졌다. C의 말이 맞았다. 도무지 나는 이 자리를 감당할 깜냥이 되지 못했다. 심정은 당장이라도 상을 엎고 개 진상을 피워 난리 치고 싶었지만, 방 안에는 내가 모르는 K의 친구도 있었고 아마 K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리라. 나는 도저히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내가 마주한 이 상황을 무슨 수로 헤쳐 나갈지, 어떻게 자리에서 벗어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K와 그녀의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제 나와 A만 둘이 남게 되었다.
“와.... 씨발, 놀아난 거였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이들이 나를 얼마나 호구로 생각했는지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람이란 게 엄청난 화가 가슴에서 불을 지피면 오히려 펑 하고 터지지는 않는가 보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A의 아구창을 갈기고 싶었지만 그건 그냥 못난 행동일 뿐, 어차피 나는 게임에서 진 루저나 다름없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서 나는 A에게 별다른 말 없이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전하며 사태를 끝내려 했다. 그랬더니 A는 내가 K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 보였다.
나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잃었다. 더 이상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그냥 알던 사이도 아니고, 나만 간직한 비밀을 너에게만큼은 공유할 정도로 우린 가까웠는데... 그 딴 말로 핑계를 대려는 태도가 오히려 엄청난 배신감으로 느껴졌다. 사람간의 감정이야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지만, 나를 이 자리에서 확인까지 시켜주려는 너희들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의도에서 충격을 먹었다고 전했다. 그냥 둘이 잘 사귀면 되지, 내가 지금 여기서 축하라도 해서 들러리라도 서기를 원하느냐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 나는 그냥 됐다고 말하며 조용히 깔끔하게 끝내자고 말했다. 곧이어 K와 그녀의 친구가 돌아왔다. 나는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이들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날,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가장 큰 이유는 못난 내 모습이었다. 관심 한 번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하고 믿었던 동생에게 당한 배신감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괴로운 경험이었다. 얼마나 개호구로 봤으면, 대체 얼마나 만만했으면 대 놓고 축하를 요구했을 정도로 나를 업신여겼단 말인가.
한 동안 서글프게 운 뒤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었다. 절대 그들을 저주하려거나 원망하지는 말자고.. 안 그래도 찌질한 모습으로 끝났는데 괜히 여기서 그들을 저주한다 한들 거기에 쏟을 내 에너지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태도가 역겨울뿐더러 이 모습이 그들에게는 더 내가 바보 같다는 것을 인증하는 것 같았다. 그냥 내가 잘 사는 방법만이 가장 최고의 공격이라 생각했다. 나를 소개할 때 창피함을 느꼈다던 누나의 말에 결과로 복수한다고 말한 것처럼, 이 역시 나는 ‘두고보자’라는 각오와 함께 진짜 후회 없는 인생을 살 것이라며 악에 받친 결의를 다졌다.
이들을 증오하는 만큼 훨씬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다짐에 다짐을 하며 나는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