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글을 쓰는 게 내 삶의 분신과 같다면 피아노는 마음을 달래주는 사실상 유일한 친구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는 대신 피아노에 무한한 애정을 쏟고 있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늘 (소음 같은)소리가 흘러나와도 개의치 않는다. 사실은 음악을 듣기 위해 치는 것이 아닌 ‘내가 건반을 누르고 있는 행위' 그 자체가 즐거워서 친다. 다시 말해 그냥 건반을 두드리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내가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것은 20대 중반 CFA에 떨어지고 나서 부터였다. 꿈이 무너져 가며 답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도무지 기댈 곳이 없었다. 시간은 갑자기 붕 떠버렸고 문득 피아노를 쳐보고 싶은 막연한 생각이 들어 이를 실행해 옮겨보자고 생각했다. 클래식, 뉴에이지는 원래 예전부터 좋아했으니까. 그렇게 덜컥 나는 학원부터 등록 했다. 당시 15만 원의 학원비는 자격증 준비로 개털이 된 나에게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다녀야 했던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정’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해서였다.
친구한테 종일 외롭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매일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다행히 학원에는 피아노 연습실이 있었기에 그냥 시간 나면 언제든 찾아가면 되었다. 나는 가장 외로운 시간대인 저녁 6시에서 9시 사이에 그곳에서 혼자만의 감정(가족문제, 미래의 막막함, 실패로 인한 자존감 하락)을 묵묵히 삭히며 건반을 눌러대곤 했다. 이때 피아노에 ‘도’가 어디인지도 몰랐던 나에게 처음에는 당연히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악보 자체도 읽지 못했던 지라 처음 일주일은 건반이 아닌 계이름부터 외워대기 바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멜로디를 익힐 수 있었고 결국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쉬운 버전(그것도 오른손 멜로디만!)까지 쳐보면서 아주 약간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당시의 피아노 학원은 3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3학년을 마치고는 노가다를 해서 서울에 갈 종잣돈을 마련해야 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5~6년의 세월이 지나 어느새 기자가 되어 있었다. 미친 취재압박과 집을 사겠다는 야욕을 보이며 숨 가쁜 생활을 보냈지만 그래도 여전히 외로움은 안에 남겨졌다. 글을 쓰기에는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잘 쓸 자신이 없었고 뇌가 휴식할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내 안의 감정을 덜어낼 수 있는 무언가는 요구되어 졌고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피아노에 내 감정을 위탁했다.
두 번째 배움에서부터 나는 덜컥 피아노부터 구매를 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이전처럼 짧게 배울 것 같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처음부터 피아노를 곁에 두고 시간이 날 때 마다 건반을 두드리고 싶었다. 비록 다시 계이름부터 외워야 하는 고된 수행과정을 겪었지만 처음부터 나는 원하는 곡을 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지향하는 목적에 맞게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건반을 누르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잊기 위해 바쁜 회사 생활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누구는 말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바쁜 회사 생활이 이전의 상처를 건강하게 치유하기에는 도움 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빠도 공허함은 찾아왔고 날을 새고 모처럼의 휴식을 맞는 날에도 외로움은 어김없이 밀려왔다. 늘 누군가의 만남에 대한 갈망에서 염증을 느끼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러지도 못한 날엔 오히려 더 심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건 바쁜 삶을 살아서가 아닌 누적된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적절한 출구를 찾지 못한 것에 기인했다. 나는 이를 건반에 녹여 덜어냈을 수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관계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악전고투 해가며 취미 생활에 애정을 쏟았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초안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9+1이다. (퇴고하는 시점에선 20여 곡에 달한다!) 9곡은 진도를 모두 마쳤고 마지막 10번째 곡을 즐겁게 배우고 있다. 이번 곡마저 진도를 마친다면 나는 피아노를 통해 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바로 10곡을 익혀보는 것. 처음 피아노를 배웠을 때는 정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꿈이었는데 어느덧 거의 현실화 단계에 서게 되었다. 개중에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merry christmas mr.lawrence’의 쉬운 버전도 포함되지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nuvole bianche’ 등의 원곡도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지금 배우고 있는 곡은 베토벤의 ‘Pathetic 소나타 2악장’이다. 우리에게는 ‘비창’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