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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Dec 02. 2022

20세기 소녀

‘저, 이번에 내려요.’      



         

전자공고 그 오빠에게 말을 건넨다.

‘전, 사실 두 정거장이나 지나쳤어요.’

드디어 ‘그와 나 둘 만에 세계가 열리는 듯 했다. 그리고 이 로맨틱하고 달콤한 하트는 기사님의 급정거와 함께 무참히 깨어져 버린다. 끼이이익. 한창때 남자 손임을 의심 할 만큼 가녀린 그의 팔뚝에 소녀의 통통한 손바닥이 포개졌다. “에이씨, 재수없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빠르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를 쏘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 모든 것은 내가 뚱뚱하기 때문이야. 열여섯, 소녀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캄캄한 새벽 같았다. 또래들이 하나 같이 고민하던 붉은 여드름은 없지만, 잘 달인 간장마냥 살갗이 검다는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신장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소싯적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 칭송 받았던 넓적한 얼굴은 옆머리로 가리고, 월남치마 뺨치는 교복도 접어입지 않았다. 펄럭이는 치맛단 사이로 꽉 찬 종아리 근육이 가려지길 희망하면서. 지금 모습으로는 도저히 사랑스러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살부터 빼야겠어. “여자라면 모름지기 날씬하고 봐야지.” 백화점에서 일하는 막내고모는 소녀를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다이어트 할 마음의 준비는 완벽했다. 이젠 그가 내게 반할 일만 남았다. 우리는 연둣빛 하이틴 로맨스의 결정체가 되고, 여차하면 대학캠퍼스 커플까지도 가능하리라. 참, 그래도 첫 키스는 성년의 날에 해야겠지. 밤새 김칫국을 궤짝으로 퍼마셨다. 날씬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을 상상하며 자물쇠 달린 일기장을 닫았다.      

         



2교시 마침종이 들리기 무섭게 4층에서 지하1층 매점까지 날아다니는 소녀였다. 10분이면 캡틴우동에 더운물을 부어놓고 , 꼬마김밥으로 입가심하는 자신의 노련함이 퍽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코를 박았다. 배가 고파서 화장실에 다녀올 힘조차 나질 않았다. 매점동지들의 눈초리가 따가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에게는 예뻐져야 할 명분이 있었다.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어쩌면 꿈에서 조차 오빠만 찾아 헤맸다. 6개월 남짓 흘깃 쳐다만 보았다. 길고 창백한 피부에 가방을 한쪽 어깨로만 매고 걷는 모습이 설레게 만들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학교에서 두 정거장 앞선 전자공고 학생이 분명했다. 마르고, 곱상한 외모가 영락없는 기생오라비였다.



이후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봉밥에 길들여진 소녀의 위는 갑작스레 줄어든 양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냄비에 물을 잔뜩 붓고 끓여서 먹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무엇보다 슬펐던 날은 공식적으로 삼겹살을 굽는 아버지 월급날이었다. 애먼 생배추에 짜디짠 쌈장을 찍었다. 저혈압으로 쓰러진 날은 체력장의 피날레, 오래달리기를 하던 중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는 양호실에 누워있었다. 


이쯤 되니 주변에 눈길이 뜨거웠다. 왜 갑자기 살을 빼고 야단이냐, 밥은 먹고 운동을 해야지, 스무 살 넘으면 알아서 빠진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소녀는 귀를 막아버렸다.






49키로그램.           


두 달 만에 무려 14킬로그램이 빠져나갔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커졌다. 교복이 헐거웠고, 실내화는 걸을 때 마다 들썩였다. 제일 먼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사건이후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10분 일찍, 혹은 지각 직전 버스를 탔었다.              

  

오, 하나님.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바닥에 침을 뱉고 있는 남자가 그가 아니길 바라옵나이다. 가방을 매어든 한쪽 어깨는 축 처졌고, 턱밑으로 자란 까칠한 수염이 더러웠다. 삐쩍 마르기만한 몸에서 남성스러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방에 책은 두고 다니나? 공부는 하는 거 맞아? 필시 내가 살 빼는 두 달 동안 저 오빠는 저주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이어리부터 찾았다. 그와의 러브스토리를 북북 찢어버렸다.







창밖은 밤새 내린 빗방울들로 촉촉하게 젖어 있다. 늦여름쯤 시들었던 사루비아는 뒤늦은 11월에 다시 꽃을 피우는 중이다. 한철보고 끝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활짝 예쁨을 발해주니 한없이 고맙다.


그땐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진홍빛 사루비아 같았던 소녀를. 이젠 내가 힘껏 안아줄 수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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