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할매, 나는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할매가 창피하다.
다 늙은 여자가 남새밭에 쪼그려 앉아 오줌 누는 꼴이라니. 오줌 누는 것까지 이해한다 치자, 유리잔 가득 소변을 받아 물 마시듯 들이켠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매일 자기 오줌을 마시면 할매의 당뇨병이 씻은 듯 낫는다고 한다. 병을 치유하는 목적이거나 말거나 12살 손녀의 눈에는 더럽기가 매한가지다.
할매는 속옷도 안 갈아입는 게 틀림없다.
작은엄마는 당분간 할매 방에서 같이 지내라지만, 퀴퀴하고 시큼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미간에 힘을 주고 할매를 노려보았다. “팬티 쫌 갈아입어라.” 할매와 다르게 방은 말갛다. 빈번히 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할매가 춥다고 손사래를 쳐도 날마다 환기를 시키고, 이불은 일주일이 멀다 하게 세탁실로 끌려갔다. 아마도 피죤을 들이붓는 것 같다.
할매밥은 보리밥이다.
찰기가 하나없이 푸실 거리고 미끄덩거리기까지 한다.보온밥통에는 우리가 먹는 쌀밥과 할매가 먹는 보리밥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손녀는 주걱으로 밥을 펄 때마다 바싹 기를 곤두세웠다. 행여 보리쌀이 제 밥그릇에 한 톨이라도 들어올까 봐. 과수원일로 바쁜 어른들이 참으로 사놓은 라면을 끓일라치면 할매는 귀신같이냄새를 맡고 들어온다. “나도 라면 국물 좀 도고.” 눈살이 찌푸려진다. 성가심에 애먼 그릇을 쾅하고 내려놓았다.
“할매 아프니까 네가 잘 돌봐드려야 한다.”
아빠는 방학하기 무섭게 딸을 시골에 내려놓는다. 쏜살같이 떠나면서도 방학숙제 마냥 할매 보필을 다짐받았다.
할매가 아픈 척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아침이면 밥상에 숟가락 내려놓기 무섭게 고쟁이를 추스르고, 탱자나무집으로 출근한다.
경북 의성군 비안면 구연리에서 시집온 우리할매는 이른바 ‘구연띠’로 불린다.
“구연띠가 화투 패는 잘 섞제.”
모포 위로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가 흐트러져 있다.
태액 태액 차지게 내려치는 저 모습을 아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나절을 그림과 씨름하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나를 부른다. “윤아. 윤에이.” 바지춤 위로 사탕이 볼록하다.유가 맛, 계피맛, 박하맛은 쏙쏙 가려진다. 과일 맛 사탕만 가져오라고 오십 번을 넘게 말했는데, 할매는 만날 천날 까먹는다. 어렵사리 찾은 자두 맛 캔디를 쏙 짚어 넣는다. 은은한 자두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한글을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은 찬송가를 부를 때였다. 까막눈인 할매는 늘 한 박자 늦었다. 성가대 입모양을 보고 뻐끔뻐끔, 꼭 물고기 같았다.
“이게 할매 이름이다. 손. 원. 녀. 따라 써 봐라” 일흔이 넘은 할매는 내 첫 번째 학생이 되었다. 깍두기 모양의 네모 칸에 연필심이 부러져라 꾹꾹 눌러쓴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우리의 ‘학교놀이’는 순조롭지 못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툭하면 언성이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교재라고는 찬송가가 전부였고, 교육생의 학습 수준을 고려하기엔 강사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아. 아까 했잖아. 또 까먹었나?” 나는 울화통이 치밀고, 할매는 자주 의기소침했다. 봄방학마저 할매 한글 공부로 영영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하데이. 할매가 못 나서 백지 귀한 손녀를 이래 고생시킨다.” 한참 받아쓰기를 불러주던 어느 날인가 보다. 그날의 내 감정을 지금도 모르겠다. 화가 났던 것같은데 할매한테 난 건 아니었다. 때문에 사과가 몹시도 불편했다.
5교시 마침 종이 울리지 않았다. 교실 뒷문이 드르륵. 최초의 담임 호출이다.
향년 72세. 지긋한 당뇨합병증을 앓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당장은 슬프지도 않았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 병원으로 모셔와 다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어서일까. 할머니의 장례는 교회 식으로 치러졌다. 입관을 따라가는 대신 어린 사촌동생들을 돌보았다. 장례식이 끝나갈 무렵 생전에 다니셨던 교회 목사님이 아는 체했다.
“서윤이구나. 숙녀가 다 됐네. 권사님이 손녀 자랑을 얼마나 하셨는지 모른다. 한글도 네가 다 가르쳐 준거라며. ”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꺼이꺼이. 목이 메 호흡이 가빠질 때까지 슬픔을 토해냈다. 항상 부모 사랑의 결핍을 할머니에게서 찾으려 했었다. 그저 내편이 되어 주니까. 철부지처럼 지껄이는 말에도 묵묵히 들어주고, 크면 다 잘 될 거라는 말로 위로하셨다.
물 한잔 떠 달라는 걸 그렇게 퉁퉁거리고, 심부름이 귀찮아 귀가 안 들리는 체하고, 주름진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을라치면 더럽다고 뿌리쳤던 못난 기억이 한동안 따라다녔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데, 이젠 방법이 없다.
햇살은 따뜻한 데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손도, 발도 그리고 마음까지 시리다.
벌써 여러 계절을 보내며 까무룩 사라진 지 오래인데,
'친애하는 나의 할매, 나는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