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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Dec 16. 2022

열아홉

제1화. 소갈빗집 단기알바

“전 남자 친구 사귀고 싶어요.”    




2001년 11월 5일 수학능력시험. IMF 세대로 불리며 격정적인 사춘기를 보냈노라 하고 싶지만, 소녀의 열아홉은 여지없는 순정만화였다. 

수능 끝나면 제일 먼저 뭐하고 싶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연애로 답했다. 물려받은 교복을 벗어던지니 하나 걸칠 게 없었다. 차마 티 내진 않았지만, 미진이가 입은 빈폴 떡볶이 코트가 부러웠고, 19년을 깊은 사색에 빠트렸던 곱슬머리와의 이별 또한 시급했다. 없던 남자 친구가 뚝딱 생겨날 것만 같았다.








각설하고, 지금 필요한 건 알바다.

콜라텍 사이키 조명 아래 축배를 드는 대신 횡단보도 앞에서 벼룩시장을 펼쳐 들었다. 벼룩시장, 교차로, 동네방네가 대구의 3대 생활정보지였던 시절이다.  


**한우 소갈비, 단기 알바 모집, 월급 80만 원.


버스로 3 정거장. 무려 소갈비다. 여기서 일하면 소갈비는 실컷 먹겠는데.      

2001년 11월의 어느 날, 200평이 넘는 대형 소 갈빗집에서의 첫 알바가 시작되었다. 깔끔한 외관에 이미 시대를 앞서 나간 발레파킹이 항시 대기 중이었고, 자동문이 스르르 열림과 동시에 많은 종업원들이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8개의 크고 작은 방에 전담 서빙 직원이 있었는데, 홀 직원만 8명, 고기 써는 직원이 3명, 주방 찬모님과 조리원들, 숯불 장치 직원까지 족히 20명이 넘었다.            



      

아빠 월급날 자욱한 연기 속에서 말없이 돼지갈비를 뜯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가족이 자주 다니던 갈빗집은 1인분에 2천 원, 그보다 10배가 넘는 사악한 가격이었다. 

     

포지션은 홀서빙 보조. 홀직원들끼리는 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언니’라는 호칭을 썼다. 40대 중반의 언니가 유니폼을 건네주었다. 젠장, 또 교복이야? 몸에 딱 달라붙는 블라우스에 짧은 남색 치마가 근사 할리 없었다. 정갈하게 빗은 머리를 고무줄로 동여맨 후 검은색 리본이 달린 망사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들 분칠에 분주한데 쭈뼛거리고 있자 누군가 빨간 립스틱을 쥐어주었다. 쥐를 잡아먹은 날이었다.     


이윽고 소 갈빗집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열아홉 소녀에게 브래지어 사이 뽕이 되어주었다. 마치 명품관 초짜 어드바이저가 허세에 물든 것처럼. 실상은 갈비 뜯으러 온 손님이 가장 부러웠는데 말이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10시에 퇴근했다. 중간에 브레이크 타임이 2시간 있었는데 그때는 직원들끼리 돌아가면서 당번을 섰다. 업무는 단순했다. 플라스틱 투명 물병에 컵과 돌돌 말린 일회용 물티슈를 인원수에 맞게 들고 가 주문을 받았다. 식당의 메인 메뉴는 생소갈비, 양념 소갈비, 갈빗살 까지 크게 3가지였고, 메뉴판 한 귀퉁이에 특선 메뉴도 있었다. 품목은 뚝배기 불고기와 갈비탕인데 소갈비라는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소위 미끼상품이었다.      







낮 손님은 주로 계모임 나온 늙은 여자들이나 근처에서 근무하는 남자들이었다.       

“뚝불 2개 있어요.” 빌지에 받아쓴 주문 내역을 홀에 전달했다. 카운터에 근무하는 전무님은 특선 메뉴를 말하면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매하게 기분이 별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를 따라 하게 되었다. 옷이 후줄근한 손님을 보고 메뉴를 지레짐작하는 나쁜 버릇이 그때 생겼다. 역시 희미한 경멸의 눈초리로.     


“생 둘에 양념하나요.” 고기 메뉴를 주문받으면 부산해진다. 동그란 스텐 뚜껑을 열어 숯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귀에 이어폰을 낀 장치 아저씨는 넓적한 무쇠 막대기에 꽂힌 새빨간 숯불을 테이블 중앙에 꽂았다. 주방 찬모님은 조선족이었는데 감자를 으깨 만든 사라다와 뒷고기로 끓인 된장찌개가 일품이었다. 설마 김치까지 국산 고춧가루를 썼을라. 중국산이라도 아낌없는 양념에 빛깔 고운 겉절이가 상에 올랐다. 고급식당에 걸맞게 상 물릴 때까지 젓가락 안 가는 곁가지 음식은 취급하지 않았다. 양념갈비는 죄다 갈색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마블링과 선도 좋은 고기는 생갈비로 판매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자태가 고왔다.    



            

전무는 다녀간 이력이 있는 손님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 특별히 많이 드린 거라고 해.” 정확히 3인분을 내어주면서도 잦은 엄살과 공갈을 쳤다. 시킨다고 따라 하는 여학생의 뻔뻔한 거짓말에 손님들은 잘도 속아 넘어갔다. 오히려 정량을 받은 쪽에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꼴이었다. 직접 굽기를 원하는 손님을 제외하고는 첫 판은 서빙 직원이 테이블에 붙어 앉아 고기를 구웠다. 양념고기는 쉬이 타기 마련이라 집게와 가위를 든 손에 긴장의 끊을 놓을 수 없었다.


그중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손님들은 필요한 것을 한 번에 하나씩만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여기요, 재래기 한 탕 더 주세요.", "여기요, 불판 좀 갈아주세요.", "여기요 소주 하나요." 같은 3번 손님인데, 수도 없이 내 발목을 잡아끈다. 재래기를 들고 가면 전도 리필이 되냐고 묻고, 불판을 갈고 있으면 공깃밥에 된장을 주문하고, 소주를 들고 가면 환타는 무슨 맛이 있냐고 반문했다. 




둘째, 호칭은 딱 3가지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모' 부계보다는 모계가 더 친숙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자들은 죄다 이모로 불렸다. 고모는 왜 없지?

'사장님' 남자면 다 사장님이란다. 카운터에 서 있는 전무도 불판을 들고뛰는 찬호 오빠도, 주차요원을 맡은 사장 아들도 다 사장님이었다.

'여기요' 여기요야 말로 만닝치트키다. 호칭이 모호할 때는 여기요가 최고다. 심지어 중간 휴식시간에 낮잠을 자다가도 희미하게 들리는 여기요 소리에 눈물 뜬 기억이 있다.


 





   





쟁반 운반차에 펄펄 끓는 뚝배기 불고기와 2인 찬이 배달되었다. 반사적으로 온장고에서 뜨거운 공깃밥을 꺼내 들었다. "앗, 뜨거." 요령 없는 초보 알바생이다. "쯧쯧, 아직 갈길이 머네." 들고 있던 밥을 쏙 앗아가며 얼굴이 네모난 언니가 말했다. 양손에 공깃밥을 들고도 평온한 모습이 조금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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