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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Dec 23. 2022

열아홉

제2화. 혜지의 세포들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유니폼만 입으면 고개가 좌우반동을 일으켰다. 사람 드나듦이 잦은 식당이라는 공간은 손님만큼이나 직원도 수시로 교체되었다. 그 덕에 단기알바 중 초고속 승진을 했다. 작은 룸 하나를 전담으로 맡게 된 영광을 안았다. 뜨거운 공깃밥을 너끈히 잡고, 부르지 않아도 척척 불판을 갈았다. 갈비 굽기의 최종관문인 뼈에 붙은 살점을 말끔히 도려내던 날, 네모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선한 눈매가 보살 같았다.


예약판에 가끔 회사명이 적힌 날은 내심 반가웠다. 회식 중 기분 좋게 술 취한 부장님들이 쥐어주는 만 원짜리 한 장 때문이었다. “학생, 열심히 사네. 우리 딸은 수능치고 팽팽 놀고 자빠졌는데 말이야.” 칭찬이 오묘했다. 까짓 학교 자퇴하고, 계속 돈을 벌까 보다.  



             





빛 한 줄기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회색빛의 어느 날이었다.     

퇴근시간에 가까워오자 직원들은 분주했다. 어느새 진눈깨비는 제법 굵직한 눈송이가 되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이 세찼다. 택시를 부르고, 남편을 호출하고, 능력 있는 언니들은 벌써 연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생각에 아득한데, 하얀색 아반떼 차량이 경적을 울렸다     


“눈이 너무 온다, 오빠가 집까지 태워줄게.”

고기 써는 오빠다. 자세히는 고기 써는 오빠 중에 제일 잘 생긴 서른한 살 영대오빠다.

탈까, 말까, 꽁꽁 얼어붙은 발이 차에 오르길 재촉했다. 낯설지만 호기심이 맹렬히 솟구쳤다.     

차 안에는 짙은 어른의 냄새가 났다. 대놓고 코를 벌름거릴 수 없으니, 스킨인지 향수인지 통 가늠이 안 갔다. 퇴근과 동시에 다시금 세수를 하고, 민트향 스킨을 찹찹 발랐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응큼한 신경세포가 꿈틀댔다.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회색 정장바지에 하얀색 목폴라를 입은 오빠는 근사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수줍은 대화를 이어갔다.


행 간 사이가 멀지도 급하지도 않게.


집으로 가는 10분이 못내 아쉬웠다.               






더 이상 눈 오는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밤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훈훈한 히터 바람을 느끼며 짧은 데이트를 즐겼다. 그는 인물화 그리기가 취미였다. 더러 자취방에 와서 함께 감상하길 바랐지만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원래 미대생이 되길 꿈꿨으나, 출구 없는 굴레에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이기적이고 똑똑한 형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취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다소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사를 읊조렸다.    

 

“오빠가 우리 지야 보쌈해 갔으면 좋겠다.”     


머리카락에 베인 고기냄새를 감추려고, 새로 산 베이비파우더 향수를 들이붓고 그를 만났다. 무릎에 포개진 나의 왼손을 자연스레 앗아간 그가 속삭였다. 손등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으으.” 잠시 지구에 불시착한 외래어가 튀어나왔다. 곧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동시에 소변이 마려웠다. 돌아본 운전석 차문이 수증기로 흐릿했다. 이제 그에겐 망설임 없이 욕망이라는 향수가 드리워졌다. 성숙한 그의 손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시트를 뒤로 젖혔고, 나는 분위기상 눈을 감아야 할 것 같았다. 입을 벌려야 하나 다물어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말캉한 혀가 쑥 들어왔다.     



  





댕댕댕.

훈수두기를 좋아하는 혜정이 말로는 첫 키스의 순간, 귓가에 종이 울린다고 했던가.

가시나. 구라치고 앉았네. 담배 맛이 났다. 예상외의 맛에 웃음이 나왔다. 아빠의 담배 연기를 산소처럼 마시고 자란 내가 여태 그걸 몰랐다니.         

그의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도 좋아진 건 키스 이후였다. 꿈꿔왔던 첫 키스를 망친게 미안했던 아니 키스를 멈출 수 없었던 그의 콘솔박스 안에 사탕과 초콜릿이 소복이 쌓였다. 사탕키스는 녹이는 재미는 있지만 키스 자체의 집중이 힘들었고, 초콜릿키스야 말로 취향저격이었다. 혓바닥에 두껍게 깔리는 단맛의 무게가 키스를 위한 기호식품일지도.     




창밖에 또 눈이 내린다.

나의 갈증과 아지랑이 같은 설렘에 다정한 눈짓으로 대답하던 그와의 겨울은 참 따뜻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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