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번 선생님은 좀 달라. 5학년 3반으로 학급 이름 공모전을 여신데. 나도 해 볼까?”
“사람은 원래 마음속에 보석을 가지고 태어난데. 우리 눈에 보이는 건 나는 ‘아주 작은 나’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큰 나’가 또 있데. 근데 이 ‘큰 나’ 안에 보석이 숨겨져 있다더라. 자그마치 52개나!”
“오늘은 국어시간에 ‘고민 엽서 나누기’를 했거든. 선생님이 지금 최대 고민을 적어내라고 하시더라. 대신 비공개로. 그러고 나서 고민이 적힌 엽서를 다시 랜덤으로 나눠주셨어. 친구 고민에 댓글달기를 해 보자고.
그런데 엄마, 마지막에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은 댓글 순으로 별점을 매겼거든. 나 별 몇 개 받았는지 맞춰봐. 5개가 최대치였는데 나 5개 받았어!"
저녁 식사시간.
고개를 처박고 묵묵히 젓가락 낚시질에만 집중하던 녀석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아이는 매일 같이 소식을 물어오는 제비가 되어 학교에서의 일과를 종알종알 풀어냈다. 까마득한 옛날, 브로드웨이배우를 꿈꾸던 여자의 리액션이 빛을 바랐다.
“진짜? 내가 도와줄게. 엄마가 또 그쪽으론 전문가잖아.”
“대단하다. 네 안에 보석이 52개나 숨겨져 있다고? 어쩐지, 우리 아들은 늘 반짝반짝 빛나더라니!”
“너는 어떤 고민을 적었어? 너희들이 직접 고민 상담을 한 거네. 이야 신박하다!”
아이는 적재적소에 알맞은 추임새를 사용하는 엄마를 보며 이야기에 더욱 힘을 실었다. 쉬는 시간에는 포켓몬카드를 거래했고, 수요일 급식에 나온 치킨 마요 덮밥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가 하면, 은밀한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녀석은 자연스레 이야기꾼이 되어 가고 있다. 맛깔난 전달을 위해 서사에 더러 양념도 치고, 억울했던 사연을 토해 낼 때는 불규칙한 콧김을 뿜기도 했다. 여자는 한순간도 아이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수박이는 체리의 형이다.
동생이 느린 아이로 판정을 받고 센터로 출근부를 찍은 이후부터 형에게는 새로운 시간이 생겨났다. 혼자 놀아야 하는 시간, 스스로 버텨내야 하는 시간. 사방에 몹쓸 병이 돌아 보호자 1인외에 치료실 출입이 금지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수박이에게 핸드폰이 없던 터라, 둘사이 메신저 역할은 노란색 포스트잇이 대신했다.
‘엄마 체리랑 센터 간다. 간식 두고 갈게’
태권도 가방을 던져둔 아이는 엄마가 일러준 대로 전자레인지에 30초간 핫바를 덥히고, 색종이를 접었다. 딱지 컬렉션에 싫증이 나면, 개구리 부족을 완성했고, 어느새 뱅뱅 도는 팽이가 상자 가득 쌓여갔다.
그녀는 발라먹을 케첩을 챙기는 새심함을 발현하지 못했고, 아이의 작은 손가락에 생긴 물집의 원인은 병원문을 나오고서야 ‘아차’하는 무딘 엄마였다. 무던하게 견디고 있는 수박이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해, 매일 밤 자는 아이 얼굴을 보며 내일은 팽이 대결을 해 줘야지 했다가도 다음날이면 또 다음날을 기약했다.
“수박이는 진짜 어른스러워요.”
“어떻게 하면 애가 저렇게 착하고 얌전할 수 있나요?”
11년, 수박 이를 키우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인사가 비수가 되어 돌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유치원과 일주일 텀으로 먼저 시작한 큰아이의 방학식. 둘만의 데이트를 꿈꾸며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아이에게 물었고, 당시 수박이의 표정에서 '대략 난감'이 읽혔다. 엄마랑 동생 없이 둘이서만 노는 것도 어색하고, 평소 대화의 물꼬를 틔게 했던 것도 애교 많고 살가운 동생 몫이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영화관을 택했다. 같은 곳에 시선을 두면, 대화가 오고 갈 필요가 없으니 느닷없이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기에 최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3D영상 속 평화로운 물속장면에 손을 뻗게 만드는 ‘아바타 2’였다. 바닷속 깊숙한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빛의 부드러운 울렁임과 형형색색 물고기에 빠져 3시간을 순삭하고 아이와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대박. 수박아 진짜 재밌더라. 그렇지?”
“재밌긴 한데 난 좀 슬프더라.”
“왜? 첫째 아들이 죽어서?”
“어, 그것도 맞고.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결국 인정받는 건 둘째더라. 첫째는 착해, 둘째는 욕심도 많고, 엄마아빠 말도 안 듣잖아. 근데 이거 알아? 나중에 잘되는 건 둘째야. 이상하지?”
“아, 너도 첫째니까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겠네?”
“가끔. 엄마가 체리 때문에 힘드니까 내가 잘해야지. 그런데 엄마 그 말은 좀 하지 마. 체리한테 '형아 진짜 잘하지' 계속 그러니까 짜증 나.”
'켈록 켈록' 어설프게 넘긴 감자튀김이 목에 걸렸다. 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아픈 아이에게만 머문 시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아니 어서 둘째로부터 손을 떼고 싶은 바람으로 어느새 큰아이를 표본으로 쓰고 있었다. 못하는 애 옆에 ‘잘하는 애’로 있으면서 아이가 느꼈던 부담은 안중에도 없었다. 열두 살 수박이를 어른스럽고, 착할 것이며 얌전하기를 강요한 사람이 결국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무너졌다. 너만은 내 꿈이길 희망이길 바랐던 속마음을 들켜버린 날이다.
“아. 엄마가 너무 미안해. 네가 이렇게 힘든지 정말 몰랐어. 그동안 진짜 힘들었겠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여자는 아이의 손을 끌어왔다. 말캉하던 손가락에 어느새 단단한 마디가 생겨나 있었다. 똑같이 배 아파 낳은 자식임에도 부족한 아이를 한번 더 쳐다보느라 큰아이에게 눈 맞추고, 웃어주지 못한 세월이 길었구나. 수박이도 엄마 사랑이 간절한 아이였는데...
난데없이 눈물을 보이는 엄마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아이는 뿌리치지 않았다.
요즘 수박이의 최대고민은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피곤하지만 막상 누우면 잠을 이룰 수 없어 어떨 때는 자정을 넘기기도 한다. 모자는 불면증 치료법을 초록창 지식인에게 물어도 보고, 숙면을 위한 다소 무게가 있는 이불을 함께 구입했다. 동생은 밤잠을 기다리는 형을 위해 잠 대신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준다.
"형아, 눈을 꼭 감고 양을 100마리 세면 잠들 수 있데."
누구보다 진지한 동생의 말에 수박이가 웃는다. 입가에 묻은 하얀 우유 자국을 혀로 지우는 아이얼굴이 해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