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원조 바비 인형은 이 여사를 두고 나온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올해 66세가 되었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사자머리와 초강력 스프레이로 한껏 세워 올린 앞머리, 오버 사이즈 재킷에 달린 어깨 뽕은 그 시절 파워 우먼의 상징이었나 보다. 나는 쌍꺼풀진 크고 진한 눈에 오뚝한 코, 또렷한 이목구비를 드러내면 시원스레 웃고 있는 사진 속 그녀가 가증스러웠다. 나를 버리고 가신 임은 발병이 났어야 하는데...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 89 9 30 날짜가 적힌 필름 사진 덕에 내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여섯 살. 그때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영천시 화산면에 위치한 화동초등학교 뒷골목에는 여자네 점빵집이 있다. 애당초 점빵은 아니었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별안간 유명을 달리한 남편 대신 생계를 꾸려야 하는 여자어머니의 차선책이었다.
여자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는 사실은 명절날 그녀의 언니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운동회 때 계주선수였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는데, 손목에 도장 한번 찍혀 보는 게 소원이었던 나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낮에는 동무들과 얼굴이 새카매질 때까지 뛰어놀고 밤이면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시집간 언니들이 두고 간 소년소녀 세계 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나 역시 책이 좋았다. 주로 소설이었지만. 길지 않은 인생의 변곡점 마다에도 옆에는 늘 책이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너는 네 엄마를 닮았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해도 한 줌도 허락되지 않는 기억이 아련하기만 했다. 그리곤 훗날 찾게 되면 부러진 칼 조각처럼 맞추어 보일 요량으로 ‘엄마와 나의 닮은 점=책’이라고 증표를 새겼다.
뜨거운 여름밤은 호사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할 수 있었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시절이 그랬어. 내겐 늘 붙어 다니는 주홍글씨가 있잖아.”라고 답했다. 여자는 5학년 때 몇 날 며칠 열 감기를 앓았다. 지금 세상에선 있을 수도 없는 학대라 하겠지만 남편 없이 자식 여섯을 키우는 여자의 어머니는 중이염을 인지조차 못했고, 때문에 여자는 병원 치료시기를 놓쳤다. 이후 청력 손상이 후유증으로 남아, 왼쪽 귀는 신경이 죽어 오른쪽 귀에만 겨우 보청기를 달게 되었다.
“그 집에 들어온 새댁이 말이야. 귀가 안 들린데”
몇 번을 불러야 소 눈을 끔뻑이는 여자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녀에 대한 조각을 주워 모으던 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촌부들이 걱정 반, 흥미 반으로 하는 며느리 험담에 소금 한 바가지를 뿌려 내쫓았다는 일화는 몇 번을 들어도 짜릿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섯 살 난 딸을 두고 간 여자를 나무라면서도 결혼 후 밥벌이 한번 해 본 적 없는 못난 제 자식 흉은 절대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