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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Apr 05. 2023

조각을 찾아라

제2화.

기억한다. 여린 봄날이었고, 때마침 꽃잎이 내려와 앉았다. 아이는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만개한 분홍의 바람이 시키는 대로 빙그르르 돌았다. 제 딴엔 봄나들이를 즐기는 중이었다. ‘찰칵’ 젊은 아빠는 연신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빴고, 아빠 옆에 향긋한 분 냄새나는 언니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활처럼 길고 서늘하게.     




주인집 미망인과 대문이 달랐던 2층 양옥, 우리 세 사람의 신혼이 시작된 집이다. 결혼식은 따로 치르지 않았다. 언니는 초혼이었고, 아빠에겐 두 번째 아내였다. 빨간 원피스에 신을 리본 달린 구두를 사주기로 약속한 그녀는 이듬해 아기를 낳았다. 아빠에겐 다시 딸이 생겼고  발등이 볼록한 내겐 구두 대신 운동화가 신겨졌다. 언니는 나에게 앞으로 엄마라고 부를 것, 또한 어른들 앞에서는 반드시 존댓말 사용을 다짐받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가 태어났고, 새엄마는 몹시 야위고 메말라 갔다. 전처럼 살갗에 분을 바르는 것은 고사하고 세수나 했으면 다행인 나날이 이어졌다.    





8살 때의 일이다. 새로 사귄 현주라는 친구를 2층집으로 데려왔다. 마루(그때는 거실이라는 단어보단 마루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에 엎드려 도란도란 ‘산수익힘책’ 숙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토끼눈을 한 현주가 팔꿈치로 나를 쿡 찔렀다.


“야, 너희 엄마 좀 봐.”


처음 본 새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당장 나가라. 너는 있다가 두고 보자”


아치형 눈썹이 더욱 매섭게 치켜 올라갔고, 움푹 꺼진 볼 때문에 각진 얼굴의 뼈 구조가 훤히 드러났다. 그녀는 애써 재운 동생이 깰까 봐 나직한 복화술을 선보였다. 나는 새엄마와 마주 서 있는것 만으로 온몸의 촉수가 피부를 뚫고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현주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내가 배웅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없다. 나는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되는 것보다 ‘두고 보자’라는 경고가 현실로 일어날까 봐 무서웠다. 허락도 없이 친구를 데려와서? 아니면 집이 더럽혀질까 봐? 그것도 아니면 특별한 우리 사이가 탄로 날까 봐? 이유가어찌됐건 두 번 다시 친구초대는 없었다.     


다음날 현주는 새로운 단짝친구와 팔짱을 끼고 나를 비켜갔다.









아빠에게 일러바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잠시도 우리 둘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조차 문을 훤히 열어놓았다. 자고로 가족끼리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 우리 가정은 남다르다. 때문에 의심받을 행동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새엄마의 개똥 같은 논리에도 아빠는 찍 소리 없이 따랐다. 그저 전처와의 자식을 데리고 온 죄인이었다.


무서운 새엄마와 무심할 수밖에 없는 아빠 사이에서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어른의 사랑과 관심이 한창 필요한 시기였지만,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손을 깨끗이 씻고 청소를 시작했다. 집안에 먼지와 머리카락을 허용하지 않았던 그녀의 지시대로 마루를 3번 닦았고, 부엌을 2번 닦았다. 그리고아빠가 오기 전까지 주로 동생을 돌보았다. 살림과 육아로 피로가 누적된 새엄마를 대신해 딸랑이를 흔들고, 까꿍 놀이로 동생을 기쁘게 해 주었다. 퇴근한 아빠는잠들기 직전까지 돌이 지나 무게가 제법 나가는 동생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부녀는 또다시 불러오는 새엄마의 배를 보며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했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사건의 도화선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그날은 식사 도중 새엄마 눈치를 살피며 아빠에게 산수공부를 도와달라고 말했다. 요 전날 시험에서 경악할만한 점수를 받았고, 하필이면 틀린 문제를 고쳐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아빠는 낮에는 입시학원, 밤에는 중고생 수학 과외로 벌어먹었지만, 막상 제 자식은 이해력이 낮고, 셈이 어두웠던 것에 기가 막혔으리라. 식사를 물리고, 접이식 밥상을 내 방으로 가져와 아빠표 과외를 시작했다. 나는 산수공부를 핑계로 아빠가 없을 때 내가 어디까지 콩쥐가 되어 가는지 일러바칠 것도 염두했다. 30분쯤 지났으려나.


‘내가 너희 둘 사이를 어떻게 훼방 놓는지 똑똑히 봐라’


안방에 있던 새엄마는 동생을 부러 꼬집는 것 같았다. 빽빽 울어대는 통에 아빠가 일어나서 방문을 닫을라치면 새엄마는 언제 따라와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쿵! 옥색 동그란 손잡이가 세차게 벽을 때렸다.


양쪽으로 난 손잡이를 당기며 한쪽에서는 문을 열기 위해, 다른 쪽에는 닫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느새 감정의 활화산은 용암으로 뿜어져 서로를 할퀴었고, 입 밖으로 오물을 퍼붓고, 치유조차 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견디다 못한 손잡이는 나무문에서 쑥 분리되고 우스꽝스러운 구멍을 드러냈다. 부들부들 연필을 움켜쥔 내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당신 쟤 때매 나랑 결혼했어?”







나는 스스로 응달의 이끼이기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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