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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Mar 18. 2023

체리(하)

‘쌍그네’는 그네 하나로 두 명이서 탈 수 있다. 한 명은 그네에 앉고 다른 한 명은 그넷줄을 연결한 좁은 고리에 발을 끼우고 마주 본 뒤, 두 사람의 호흡에 맞춰 발을 굴리며 타는 방식이다.              



  

나른한 그림자가 드리운 오후,

언어치료와 놀이치료에 내리 두 시간을 시달린 아이를이끌고 놀이터로 향했다.

그네 줄이 휘어져라 신나게 포물선을 그리는 고학년 누나들 옆으로 아이는 조용히 제 차례를 기다렸다. 일곱 살, 이제는 내가 빠져도 되겠지. J는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숨 고르기를 한다. 5분쯤 지났을까. 방금 전까지 막대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누나들은 사라졌지만, 그네에는 또 다른 아이들이 장악해 있었다. “체리야, 그네 안 타고 뭐 해?”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묵직한 공기를 뚫고 퍼져나갔다.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을 확인한 뒤 마스크 위로 미간에 주름을 한껏 끌어 모았다.

“얘들아, 동생이 아까부터 줄 서 있었잖아”

“얘가 우리한테 양보해 준 건데요?”     



          

‘시발’

날 선 눈동자에도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아이를 한 대 쥐어 패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안 봐도 비디오다. 영악한 아이들은 날름 그네를 체 가며 먼저 탄다고 했을 것이고 위축해 고개만 주억거렸을 체리가 그려졌다.      


“정말 체리가 형들한테 그네 양보해 준거야?”

“응”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너를 어째야 할고.    

 

“체리야 너 차례가 되면 네가 타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먼저 타겠다고 하면 뒤에 줄 서라고 말하는 거야”


J는 부러 녀석들이 들으라고 ‘뒤에 줄 서’라는 동사에 힘주어 말했다. 눈치를 살피던 개구쟁이들은 슬그머니그네에서 내렸다. 간신히 아이를 태우려는데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안녕하세요?”

“H구나. 우리는 이제 집에...”

“체리야, 우리 소꿉놀이하자”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H다. H네는 같은 시기에 이사를 와 지역 맘 카페에서 알게 되었다. 큰아이들끼리 한 반이고 체리와 H역시 병설유치원에 함께 다니고 있었다.H맘이 애들도 놀릴 겸 커피나 한 잔 하러 오라는 다정한 초대에 응했던 날을 기억한다. 반달 눈매에 엄마를 닮아 말씨가 고운 H의 맑음이 부러웠던 그녀는 아이의눈웃음을 좇았다.   

   

“체리가 실은 조금 느린 아이거든요”

J는 새롭게 엮어가야 할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H맘에게 발화 중인 체리의 역사를 소개했다. 이에 질세라 H맘 역시 우리 아들은 인큐베이터에서 2주를 살다 나왔다는 둥, H는 입이 짧아서 여태 김치도 못 먹는다며 적당히 응수했다. 그녀들의 사교에는 믹스커피와 국화차가 연이어 등장했고 다행히 J에게 요의가 찾아와 강제 종료가 되었다. 화장실 문을 연다는 것이 H의 방문을 열게 되면서.    




  





“야! 아기는 누워서 응애 해야지. 자꾸 일어나면 어떡해?”

제법 앙칼진 목소리로 캉캉 짖어대는 H가 생경했다.     


“응애응애”

우유 빛깔 퓨어 화이트 컬러 침대에 누워 몸을 베베 꼬는 녀석과 주방놀이세트로 분유를 타고 있는 H를 보았다.

1시간째 이러고 놀았던 거야? 체리의 울부짖음이 ‘구해줘’로 들렸던 건 과연 내가 예민하기 때문일까. J는 마음이 복잡했다. 소변이 그만 쏙 들어가 버렸다.      


건넛방에서 게임 삼매경인 큰아이를 나무랐다.

“너 여기 게임하러 왔어?”

H맘에게 생리가 터진 걸로 수습을 하고, 아이들 손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언제쯤이면 아이일로 일희일비하지 않을까. 과연 그런날이 오기는 할까.         



      

여태껏 체리를 스쳐갔던 친구들은 모두 그런식이었다.

제 쪽에서 아쉬워 다가왔다가 미묘하게 2프로 부족한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나면 상황은 달라졌다. 주야장천 술래를 시키거나, 그네에 앉아 비켜주지 않는 식으로 마음을 할퀴었다. 그리곤 상처가 난 아이가 웅얼웅얼 마음을 표현할라치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다른 무리로 내뺐다. 체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원했고, J는 너덜 해진 마음을 바닥에 질질 끌고 매일같이 놀이터로 출근했다. 한때 그녀는 ‘체리가 투명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하원 시간을 피해 놀이터에 갔고, 체리가 발달센터에 다니고 있음을 알리기 싫어 미술학원에 간다고 둘러댔다. 상처받는 아이를 달래는데 한계심이 다 달았고, 타인의 동정심을 사는 것도 괴롭고, 좋지 않은 일로체리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아이는 커갈수록 엄마가 만든 작은 틀에 만족하지 못했다.               

 

“싫어, 나 그네 탈 거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J는 제 귀를 의심했다.    

 

“어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줄래? “

“싫다고. 나 소꿉놀이 안 해”

체리는 절대 하기 싫다는 의지를 재차 표현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우리 쌍그네 탈래?”

뾰로통해진 H가 황급히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음, 좋아”

세상에 방금 우리 체리 보셨어요?

J는 네 잎 클로버 찾기를 포기했다가, 방금 전 일곱 잎 클로버를 찾은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그냥 제 할 말을 했을 뿐인데, 그 말 한마디가 뇌를 거쳐 입을 빌려 목소리로 나오기까지 여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 그저 고맙고 대견했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J의 엉겨 붙은 감정들이 하나로 뭉쳐져 터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래 맞아, 네가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야. 체리마음을 말해줘서 고마워”            

그날에 J는 제 틀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아이를 세상밖으로 꺼내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체리가 쌍그네를 탄다.

야무진 종아리를 굽혀 힘껏 내딛고, 오렌지색으로 물든 하늘을 높이 날아오른다.

따스한 봄바람이 체리의 작은 이마 위로 부드럽게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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