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시계 속도가 다른 거란다”
J는 눈으로는 자신의 큰아이를 바라보며, 속으로는 그녀 자신을 위해 곧잘 의식적으로 말했다. 5주 차 계류유산 후, 한약 두 재를 지어먹고 배란일마다 기계적으로 부부관계를 가졌다. ‘체리’라는 태명은 큰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름에서 따왔다. 이를테면 태어날 동생을 위한 축하선물이었다. 마음이라는 게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임에도 낳고 보니 큰아이에게 기우는 마음이 애달팠다. 다섯 살 아이는 전에 없던 혀 짧은 소리로 사랑고백을 해댔다. “엄마, 따랑해요. 나도 안아주떼요”
출산을 앞둔 어느 날인가 보름달처럼 부푼 배를 아이 쪽으로 내밀고 자고 있었다. ‘쫍쫍 쫍쫍’ 리드미컬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큰아이가 손가락을 빨며 자고 있었다. J는 제 쪽으로 손을 끌어와 지문이 엉망인 손가락을 젖은 가재수건으로 닦고, 바셀린을 듬뿍 발라주었다. 아이의 복숭아 같은 뺨 위로 눈물을 흘렸다. 대체 누굴 위해 둘째를 가지려 했던 걸까.
태어난 아기는 순했다. 첫 수유 때 찡긋 배냇짓으로 J에게 온 세상이 말랑해지는 기분을 선사했고, 산부인과에서 집에 데리고 오자마자 통잠을 잤다. “이렇게 순한 아기는 10명도 보겠어요”
낮에는 산후 도우미의 싱크대 물소리와, 청소기 돌아가는 기계음을 들으며 밤에는 형과 엄마 아빠의 대화소리로 유대감을 확인했다.
그렇게 매일을 사는 아이가 되었다.
50일 만에 단유를 결정한 건 큰아이를 핑계로 더 편해지고 싶은 J의 욕심이 반이었다. 남편의 귀가 시간이 되면 분유를 먹는 아이를 밀쳐두고, 큰아이를 데려와 전처럼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여전히 다정한 엄마임을증명해 보이고 싶었고, 갓 태어난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겼다.
체리는 18개월이 되던 3월에 가정어린이집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라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일주일의 짧은 적응 기간 이후로 낮잠까지 잔다고 하니 그야말로 복덩어리가 따로 없었다. 밋밋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7살 큰아이는 초등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그녀 역시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동네 아낙네들과 우르르 부업에 열중했다. 그 무렵이었다. 결혼 후 7년을 내 집처럼 살고 있던 곳에서 쫓겨나듯 이사를 나온 게. 은퇴한 주인 부부로부터 들어와 살겠다는 통보를 받고, 급히 전셋집을 다시 구해야 했다. 연고지에 기반한 경기 남부로 입성하기 무섭게 지역 맘 카페에 가입을 하고 어린이집을 묻고, 학교를 따졌다. 신도시 어린이집은 입소하기까지 똥줄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금방 적응하리라.
그리고 그녀 스스로 오만했음을 깨닫기까지는 한 달이채 걸리지 않았다.
체리의 어린이집에서 날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체리는 교사와 눈 맞춤이 전혀 안 이뤄지네요”
“아무래도 수용언어 발달이 덜 된 것 같아요”
“어머니, 이런 말씀 굉장히 조심스러운 데 혹시 병원에 가보셨어요?”
42개월 체리는 ‘경계성 발달지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부여받았다.
언어면 언어, 신체면 신체 또렷한 장애를 가진 것과는 달리 경계성 발달장애는 다소 복잡했다.
“어릴 때는 단순 언어발달로 시작되지만 커가면서 학습 장애, 틱 장애, ADHD 등을 동반하면서 다양한 문제를 추가로 생산하곤 합니다”
신제품 사용설명서를 읽듯 외래교수의 차분하고 건조한 설명이 이어졌다.
‘장애’는 아닌데 ‘일반인’도 아닌 ‘경계’ 선상에 있는 아이를 카시트에 앉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갓길에 차를 세우고, 백미러로 잠든 아이를 보며 흐느껴 울었다. 울 자격도 없었다. 체리의 기억 속 엄마는 ‘음성’으로만 존재했다. ‘사랑해’라고 말했지만 정작 껴안아 준 적이 없었고, ‘아우 예뻐’라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볼을 비비여 본 적은 있었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