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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Mar 03. 2023

팬티 잘 벗은 여자

제4화.

H는 5월의 신부가 될 예정이다. 만난 지 6개월도 되지않아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게 미심쩍어 물었더니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해 버렸다고 했다. “하필이면 자취를 할게 뭐람. 오빠가 밥을 제때 못 챙겨 먹는 게 안쓰럽잖아. 몇 번 도시락 나르다가 그만...”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특유의 하얀 잇몸을 끝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마무리는 ‘자취하는 남자를 경계하라’로 일단락되었다. 성년의 날을 앞둔 어느 날 그녀와 나는 쾌락적 섹스에 반대하는 수녀들처럼 맹세했었다.

‘우리 결혼할 사람 아니면 절대 하지 말자’

친구는 약속을 지켰다.




초점 잃은 눈과 어지러운 표정이 극에 달아올랐다. 그는 꽃같이 활짝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내려가 리듬감을 잃지 않게 연신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덕분에 나의 메마른 땅에 점점 더 물이 차올랐다. 선홍색 유두가 뺑뺑하게 부풀었고, 불이 붙은 듯 홧홧한 자극은 척추를 타고 종아리에서 발가락 끝까지 내려갔다. 꿈꿔온 장면이 있긴 하다. 섹스를 하는 순간만큼은 신음소리조차 아름다웠으면 하고. 좀 더 과장된 교성을 질러보고 그의 귀에 더운 입김을 불어 무드를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쩝, 단 한 가지 아쉬움을 털자면 오랜 시간 참아왔던 그의 섹스는 다소 급했다. 돌격 앞으로! 이내 뻐근해진 아랫도리는 호기탐탐 끼어들어 올 기미만 노렸다. 이러다 상영 5분 만에 엔딩크레디트가 오를 것만 같았다. 젠장, 막아야 한다. 나는 사랑을 나누는 내내 그의 일방통행을 제제했다. “오빠, 천천히”를 다섯 번쯤 말한 것 같다. 이타적이고 온화한 그는 욕망을 조금씩 걷고, 영화의 절정을 위해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나의 반응을 살피고, 60조의 세포들과교감하기 위해 부단히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판도라 행성의 아바타처럼.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다른 한 손으로 웨이브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친밀한 그의 혀가 귓불을 지나, 작은 가슴 언덕을 쓸고, 구석진 허벅지 안을 파고들었을 때 참을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마침내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경직된 내 발가락은 꽉 오므라들었다. 몸 안에 있던 모든 세포들이 깨어나는 이 쾌감에 환호성이 터졌다. 천지가 개벽할지라도 섹스만큼은 움켜쥐리라. 나는 쉬이 뜨거운 기분이 솟구치는 그곳에서 잔꾀 부리지 않고 차례로 단계를 밟아준 그가 고마웠다. 이번엔 네 차례다.







두 번의 사정을 끝으로 우리는 빨랫감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보송하고 아늑한 극세사 이불속에서 나가고싶지 않았다. 세세한 소감은 걷어두고,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신인배우가 걸쭉한선배를 만나서 고생은 안 했는지 염려하면서. 그는 아무 말 없이 팔 베개를 내어 주었다. ‘쿵쿵쿵’ 그의 가슴에서 조금 전까지 격렬했던 여운이 그대로 전해졌다. 입을 먼저 뗀 건 그였다.


“좋았어?”

“좋았지”


훗날 말을 놓기 시작한 시점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고 간 적이 있다. 애초에 소개팅과 맞선 그 언저리에서 시작되었고, 말로써 서로를 후벼 탔던 타인과의 과오를 되새김하지 않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어느새 ‘연경빌라트’는 ‘에덴의 동산’이 되었다. 한번 맛본 환희는 정말이지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밤에는 밤손님이, 낮에는 낮손님이 되어 그를 찾았다. 하필이면 그가 자취를 하고 있었고, 밥 대신 짬뽕 쿠폰을 모으고 있었다. 엄한 놈 입에 들여보내려고 매일 아침 갓 지은 밥에, 소 불고기를 볶아주는 선량한 엄마에게 동료들과 나눠먹으니 넉넉히 싸달라고 신신당부하던 요망한 딸년이다.








신체적 나이는 속일 수 없다.


요즘 나는 다 귀찮다.


부모로서의 책무가 끝난 일요일 오후를 기다려 머그잔에 작두콩차와 반납이 도래한 소설책을 싸 들고 안방행이다. 두툼한 이불위로 납작 엎드릴 때 아래로 쿠션 하나를 박아는 걸 잊어선 안된다.  상아색 빛바랜 커튼 아래로 길이가 다른 체모들이 먼지와 뭉쳐져 뒹구는게포착된다. 커튼과 바닥사이 15센치. 층고가 높아 길이가 깡충한 커튼은 신혼초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느긋한 휴식을 방해하는 것들에서 애써 시선을 거둔다.




그는 신진대사가 활발한 청년으로 거듭났다.


아까부터 차를 내리고 책을 고를때 샤워부스로 직행하는 남편의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말에 한 시간 허용된 미디어타임. '골든타임'을 허투루 하지 않기 위해 녀석들을 현혹시켜 건너방으로 쫓았다. 일요일을 밀린 잠으로 채우던 남자에게 한때는 부아가 치밀었고, 어느 순간 딱하다가, 이제는 감사 기도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샴푸 냄새를 폴폴 풍기며 눈치 없이 따라 들어오는 그에게 뾰족하게 굴었다.

"쫌, 나 좀 쉬자"

"어떤게 쉬는건데? 쳇 속았어. 당신 이제 아줌마네"

내말이. 나도 속았다. 젓갈에 혹했고, 순수한 당신 얼굴에 속았다.


통풍이 잘되는 인견팬티가 오후 햇살에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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