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디오소년 Feb 23. 2023

팬티 잘 벗은 여자

제3화.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




차 안은 숨 막힐 듯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시시덕거리는 옅은 농담은 생략하고, 흩어진 정신을 부여잡기라도 하듯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꿀꺽. 나는 물도 없이 마른침만 삼켰다. 다소 긴장된 마음을 짓누르기 위해 라디오 볼륨을 한껏 높였다. 시시껄렁한 잡담과 광고 음악이 스쳤다. 10여 분쯤 달렸으려나, 내비게이션 성우의 침착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실키한 코너링 실력을 한껏 뽐낸 그의 SUV가 낯선 골목으로 진입했다. 반듯하게 자른 두부를 세워둔 냥 띄엄띄엄 집합건물들이 즐비했다. ‘영경빌라트’는 3층짜리 신축 건물이다. 1,2층에 세입자를 두고, 3층에는 주인 노부부가 살았다.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한 끝에 중학교 들어갈 무렵, 아버지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이룬 우리 집과 어쩐지 닮아있었다. 싸구려 셋방과, 주인집과 다른 대문을 썼던 양옥집을 두 번 더 거쳐 간 후였다.     




“차 한 잔 마시고 갈래요?”     


아뿔싸! 퍼뜩 아침에 갈아입은 속옷을 헤아려 보았다. 전면에 레이스가 둘러진 팬티, 수줍은 꽃무늬 팬티, 신상 레오파드 팬티, 중요부위조차 가릴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티 팬티까지. 죄 속옷 본연의 기능에는 자격 미달인 예쁜 쓰레기다. 큰맘 먹고 회사에 레이스 장식 속옷을 입고 간 날은 마찰로 인한 가려움을 동반해 수시로 의자에 포개진 엉덩이를 들썩여야 했다. 아마 한 줌도 안 되는 천 조각에 레이스만 거창하게 두른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주로 거사 치르는 날을 제외하곤 엄마가 사준 보정효과 UP, 팬티라인 NO라고 적힌 인견팬티를 입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오늘 역시 인견팬티를 입고 있었다.


'아씨. 미치겠네'









201호는 투룸이었다. 종일 신었다 벋었다를 반복해 고단한 내 발 냄새를 의식하며 그를 앞세워 되도록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업무용 책상 위로 시원스레 창이 나져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도로변이었다. 환기를 위해 열었다 도로 먼지가 들어오는 기이한 일을 숱하게 겪었는지 그의 방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쿰쿰한 먼지 냄새와 곳곳에 배치된 나프탈렌 냄새가 뒤엉켜 머리가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뭐 좀 마실래요?”


“아... 뭐 있어요?”     


10장 모으면 군만두 서비스가 나가는 쿠폰이 덕지덕지붙여진 냉동고를 열어 녹차티백 박스를 꺼내보였다. 그게 왜 거기서 나오느냐는 눈초리에 머쓱해하며 이사하던 날 누나가 사 다 놓은 거라고 말했다.


으레 친구집에 가면 졸업앨범을 넘겨 보며 봉인된 '흑역사'를 거침없이 헤집고, 깔깔 웃어주는 게 맛인데.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는 뭘 해야 하나. 시선처리가 불편했던 나는 그가 내려놓은 설 선물택배상자로 고개를 돌렸다. 젓갈 3종세트는 황금보자기를 두른, 고급 나무상자에 담겨있었다. 창난, 명란, 오징어젓갈. 그중 단연코 1순위는 창난 젓갈이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났더니 이제 더는 풀어 볼 것도 , 이어갈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홀짝홀짝. 소파 끝자락에 엉덩이만 살짝 걸쳐 앉아 녹차를 비워 낼 즈음, 어색한 침묵이 좁은 방을 가득 에워쌌다.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그와의 첫 섹스를 예감했다.








"오빠, 너무 환해요"


은은한 노란빛 무드등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바스락 거리는 호텔 침구를 앞에 두고 이 대사를 쳤다면 얼마나 더 낭만적이었을까. 박력 있는 남자에 의해 벽에 밀쳐져 강제로 퍼붓는 키스를 뿌리치는 나를 상상했다.


여태껏 보아온 그는 너무도 나를 배려했다. 처음 손을 잡던 날도, 간신히 첫 키스 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건조한 입술만 쪽 하고 내어주던 그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아밀라아제 좀 공유하면 어디 덧나나.


형광등 조명을 급히 끄고, 비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눌러왔던 욕망을 절절이 들어내는 그에게 건투를 빌었던 것 같다.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고, 무색 립글로스가 덧발라진 부드러운 입술을 탐했다. 나는 너무 적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소극적이지도 않게 그의 키스에 답례했다. 키스는 어느덧 목덜미에서 귀로 이어졌고, 나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깊은 호흡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작은 신음을 토해 낼 때 그의 손은 허리를 스치더니, 성글게 짜진 니트 안으로 난입했다. 정신이 든 건지 허락을 구하는 건지 잠시 머뭇거리는 그를 위해 한번 더 질끈 눈을 감아주었다.


'예스'





작가의 이전글 팬티 잘 벗은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