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디오소년 Feb 17. 2023

팬티 잘 벗은 여자

제2화.

“혜지 씨, 혹시 또 전화드려도 되나요?”





SUV는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의 약자다. 올라타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특유의 높은 시야와 개방감이 제법 흥미로웠다. 고해하건대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다. ‘서울오빠’는 일탈 같은, 적어도 쉬이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언젠가부터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내가 계산하고도자신의 적립카드를 드미는 알뜰하고 궁상맞은 어린 남자친구를 향한 권태로움이 스몄다. 속물이라 불러도 하는 수 없다. 사랑할수록 지갑이 열려야 하는데 녀석은 묘하게 몸을 사렸다. ‘라볶이에 돈가스정식은 내가 계산했으니까, 잠깐만 아까 PC방 계산도 내가 하지 않았어? 호프집은 양심상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침묵의 눈치게임, 준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느낌, 어느새 나는 돈 앞에서 한없이 치사해졌다.     


“아네. 전화하셔도 돼요”     


31살. 그는 딱 봐도 연애초보였다.(그렇다고 나는 똑 시리 프로는 아니었지만) 조절에 서툴러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는 게 눈에 보였다. 투정 부리면 받아주고,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주려고 애를 썼다.

화이트데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가 차에서 내려 보라고 하더니 드라마 주인공을 따라 트렁크 문을 열어보였다. ‘허걱’ 나보다 몸집이 큰 갈색곰이 연분홍색 사탕바구니를 끼고 떡하니 들어앉아 있었다. 인형을 안고 기뻐하는 로맨틱한 장면을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해 봤을 그를 위해 잠시 기뻐하는 양 굴었다. 세우면 족히 160이 넘어, 통돌이 세탁기에는 들어가지도 않거니와, 마대자루에 넣어 버리자니 오히려 내 돈이 더드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명절연휴를 앞두고 선 보강을 다니느라 서글픈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진취적인 도전의식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아니던가? 다양하고 짧은 이력 중 당시‘한글 방문교사’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업무일 및 회원 수에 따라 수수료가 정산되는 시스템이었고, 아침에 출근을 하면 회사에서 교육을 듣거나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보육시설에 다녀온 오후시간부터 7 가정 많게는 12 가정을 매주 방문했다.     


그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유류비나 차량 보조금도 없는 영세한 노동자를 지원 사격 나선 건 우리 관계에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다.

“태워줄게요. 나 어차피 주말에 할 일 없어서 텔레비전보던가, 현장 나가거든”

쯧쯧. 천하에 재미없는 청년 같으니라고.


오전 9시부터 시작된 보강은 어느덧 5시를 가리켰다.


15분 수업에 5분 상담, 다음 집으로 이동시간 10분까지 도합 30분. 화장실 한번 들릴 여유 없이 촘촘히 매겨진 시간표에 따라 그는 기꺼이 일일 매니저가 되어주었다. 그나마도 아파트는 주차장이라는 대기 장소가있지만, 빌라나 상가주택은 어림도 없었다. 라디오 전파를 이리저리 옮겨 가며, 20여분 주차 뺑뺑이를 돌며 혼자 골목을 방황했을 그다.


나 역시 장장 8시간 요의를 참아가며 일했다. 숭고한 노동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을 땐, 냉기 가득한 겨울 찬바람이 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곱창 머리끈을 기어코 끌어내렸다. 순식간에 사방팔방 흩어진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지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아니 짜증 낼 수가 없었다. 대로변에서 비상등을 켜고 나와있는 그가 보였기 때문이다. ‘힐끗힐끗’ 초조한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빌라 출입구만 응시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상한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오빠 추운데 왜 나와있어요?"


"어 그냥요"

그의 눈가주름이 기분 좋게 구겨졌다.








조수석에 앉자마다 열선에 온도를 최대치로 높이며, 오늘 저녁은 제대로 모실테니 뭐든 말만 하라 거들 먹였다.

이런 바보. 오늘 같은 날 고작 김떡순이란다. 누가 봐도주머니 사정을 딱히 여긴 메뉴선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시장기가 밀려와 쓰러지기 직전쯤 단골 분식집에 도착했다. 막 삶아서 촉촉하게 윤기가 도는 피순대와 후추와 땡초를 적절히 배합해 만든 새빨간 떡볶이가 철판 가득 곱게도 펼쳐졌다. 오징어튀김과, 고추튀김을 삼삼한 간장양념에 찍어 먹어도 좋지만, 내 취향은 떡볶이 소스 파다. 그가 가만 휴지를 내밀었다. 아씨. 핸드폰카메라에 비친 여인의 벌건 고추장이 게걸스러웠다.그리고 그는 나를 배려해 문자를 확인하는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설 선물 택배가 왔다는데, 혹시 젓갈 좋아해요?"


'당근빠따지. 없어서 못 먹는다고'


오글오글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생수로 급히 헹궈 낸 후,

그의 자취방으로 차를 돌렸다.








작가의 이전글 팬티 잘 벗은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