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서울오빠
“그래서 여자는 모름지기 팬티를 잘 벗어야 한다 아이가”
목울대를 조였다 풀었다 반복하기를 3시간, 맹렬히 떠들다 보면 도마 위 안줏감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어느덧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되고 만다. 침 튀기며 장단 맞출 땐 언제고, 결론은 네 남편 그만 볶아 먹어라, 팬티는 자진해서 벗지 않았냐고 20년 지기 H에게 흰소리를 했다.
스물여섯, 연하킬러는 아니었지만 그 무렵 여러 남성들과 짧은 만남을 반복하고,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적게는 한두 살, 많게는 군 입대를 앞둔 영보이도 있었다. 카키 브라운 컬러에 탱글탱글하게 말려있던 우아한 컬, 목이 길어 보이도록 최대한 끌어 모아 정수리쯤에서 틀어 올린 머리, 흑진주색 피부에 코랄 빛 립글로스를 살짝 발라 생기를 더했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나이였고, 더없이 아름다웠다. 다만 유통기한이 이리도 짧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다. 돈 되는 직장은 재미가 없었고, 안타깝게도 셈마저 흐렸다. 대책 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 하길 좋아하는 것까지, 뼛속 깊이 장 씨의 피를 덮어썼다. 그사이 또래들은 하나둘 명함을 팠다. 일개 사원에서 주임을 달고, 대리가 되었다. 겉치레에 홀려 한 없이 가볍고, 알맹이 없는 선물상자 같았던 딸이 가여웠는지 엄마는 당신 성격에도 없는 중매에 나섰다. 같은 회사에서 6개월을 관찰해 온 결과 ‘반듯하고 성실한 청년’이라고 운을 뗐다. “서른한 살인가. 서울에서 파견 나왔다 카더라. 혼자 원룸 얻어 지내는데 소장 말이 주말에도 할 거 없다고 현장에 나와 산다고 카네. 장남이고 촌에 땅도 좀 있는 것 같고, 살아봐야 알겠지만 이런 스타일이 여자고생 안 시킨데이. 니가 정 싫으마 니 친구 소개 시키주라 와”
얼마 전 집에 데려온 남자친구가 엄마눈에 차지 않았기 때문인 게 다. 처갓집 장모 마냥 고봉밥을 먹여 돌려보낸 후, 딸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쳤다. 셋방 하나 얻어서 어디 잘도 살아보라고 저주도 퍼부었었다.
엄마의 약력소개가 끝날 때까지 의도적으로 딴청을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읊어준 어느 한구석도 구미가 당기질 않았다. '어머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녀 매력 없는 남자는 싫사옵니다' 눈알만 떼굴떼굴 굴렸다.
"안녕하세요 혜지 씨죠? 어머님 소개로 전화드렸어요.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윤 찬 원이라고 합니다"
완벽한 서울말씨였다. 고향이 충청도 어디께라고 들었는데 '생존형 언어'를 습득한 건지, 어투가 국어책을 읽어 내려가듯 매끈거렸다. 네이티브 수준에 가까운 격식 있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는 이 남자의 면상이 살짝은 궁금해졌다.
"오 미쳤다! 니 이제 서울오빠야 만나는 거가?"
H는 영천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촌놈 특유의 끈끈함과 끝을 보고야 마는 저돌적인 기질이 살짝 걱정 된다고 했다
하얀색 SUV차에 문이 열렸다. 차가 높으니 키는 좀 클 것 같고, 서울말 쓰는 걸로 봐서 피부가 뽀얗지 않을까. 최근 만났던 친구가 화농성 여드름이라 키스할 때 여간 신경이 쓰였다. 미간을 모으고 시선에 집중했다.
오리털이 빵빵하게 부푼 검은색 패딩점퍼,
언젠가 나도 인디고였음을 말해주는 무릎이 희끗한 청바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미색운동화가 뚜벅뚜벅 내쪽으로 향했다.
‘아, 미치겠네. 저거 뭐지’ 부끄러운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애정하는 연 그레이 핸드 메이드 코트가,
다리선을 타고 내려가는 스키니 청바지가,
5센티 커 보이려고 신은 롱부츠까지
내게 그렇게 화가 나고 창피했다.
이왕지사 배라도 채우고 뻥 차버릴 요량으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쑥스러운 그의 손에 썰어지는 호주산 스테이크에서 육즙이 퍼져 나왔다. 자상함으로 점수를 만회하려는 심산이었는지 직접 썰어주겠노라 한참 실랑이를 했다. 식욕이 끌어 올랐다. 두툼한 고기에 곁들여진 감자와 익은 채소를 한껏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의 다정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