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너 잠깐만 이리 와 봐. 주머니 한번 보자.”
전화선을 베베 꼬던 한갓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이의 볼록한 주머니를 알아본 주인이 반색했다. 소녀는 지금 자신의 동공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세차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곧이어 다른 손님이 들어왔고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때를 보여주기로마음먹은 냥 기어이 제 손으로 주머니 속 헤집기에 나섰다.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고, 수치심이 밀려드는 가운데 마법의 주머니에서는 끝도 없이 사탕과 풍선껌, 젤리와 초콜릿이 쏟아졌다.
“당장 집 전화번호 대라.”
“안 돼요. 아줌마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집에 엄마 계시지? 전화번호 부르라고.”
“정말 안 돼요. 죄송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객들은 남의 집 불구경에 신이 났다. 팔짱을 끼고 끌끌 혀를 차는가 하면, 오지랖이 넓은 천사 같은 손님은 그래봐야 얼마나 한다고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그만 돌려보내라는 말을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는 물건을 훔치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문을 남긴 뒤에야 아이는 풀려났다. 라면하나 사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새엄마의 꾸지람은 더없이 반가웠다. 우걱우걱. 면발에 뒤엉킨 밥알을 열 번도 씹지 않고 삼켰다. 배가 고파서였는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였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괴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2번 길모퉁이에 있는 슈퍼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잘 걷다가도 슈퍼만 목전에 보이면 그 길로부터 내달렸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새엄마가 심부름을 시킬 때는 무척 괴로웠다. 골목 반대편으로 내려가 시장통 끝에 위치한 대형마트를 가야만했다. 슈퍼주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아예 새 주인으로 바뀌는 상상도 더러 했던 것 같다.
며칠 뒤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하굣길에 새엄마와 슈퍼마켓 주인이 이야기 나누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깨달았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자진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곧 날아들 회초리를 기다리면서.
그날은 북어 대가리 마냥 바싹 고꾸라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새엄마는 퇴근한 아빠에게 당신 딸이 ‘도둑년’이라고 일러바쳤다. 아빠는 어떠한 모션이라도 취해야 할 것 같아 기껏 딸을 불러 앉혔지만 막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 가득 담배 연기만 자욱했다. 나는유일하게 나를 인정하는 존재에게 초라한 실체가 발각되어, 나아가 여기서마저 버림받게 될까 두려움에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나와 새엄마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을 궁금해하지도, 수학시험에서 몇 점을 맞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여전히 나의 보호자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스스로의 무력감과 죄책감이벅차 딸의 울부짖음을 외면했다.
이따금 화가 치밀어 오르면 나이차가 큰 어린 동생들에게로 뻗어 나가는 손을 꾹 움켜쥐고 속으로 삭였다. 그러다 선물로 받은 열쇠 달린 일기장에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복수를 해 대기 시작했다. 특히 새엄마에게 꾸중을 듣거나 억울하게 맞은 날에는 꼭 일기를 썼다. 빨간색 볼펜으로 새엄마 이름을 쓰고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새엄마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이야기, 별안간 엄마가 찾아와 아빠랑 다시 재결합을 하고 새엄마와 아이들을 쫓아버렸다는 아무 말 글짓기를 쉼 없이 써댔다. 떠올려보면 그때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과연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의문이 남을 만큼 나는 일기 쓸 때 가장 행복했다.
적어도 절대 원치 않는 사람에게 읽히리라는 걱정따윈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