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선득해진 방안 공기 사이로 비밀일기장이 베일을 벗었다. 2단 책꽂이 아래에 달린 형광등은 두어 번 깜빡이더니 금세 암흑이다. 제일 먼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하트모양 자물쇠가 부서졌다. 성큼성큼 넘겨지는 일기장과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기 위해 꽉 깨문 그녀의 아랫입술을 번갈아 살폈다.
‘남에 물건에 왜 손을 대요? 당장 돌려주세요!’ 맷집 좋은 내적 자아는 이내 수그러들었다. 원망스럽게도 나는 꽤나 겁이 많았다. 매번 강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지레 겁부터 먹음을 고백한다. 무서운데 서럽고, 억울한데 비참한 기분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과 코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미끈한 액체를 손으로 훔치며 다음 처사를 기다렸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새엄마에 대한 쓰레기와 오물을 마음껏 투척하던 그곳, 내가 또 다른 네가 되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던 곳, 나를 위로하고 깊이 어루만져주었던 기억의 조각이 세상 밖으로 나와 버렸다. 빨간색 볼펜으로 죽고 싶다고 말을 수도 없이 적었던 것은 사실 죽음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내게 고통만을 안기는 아빠와 새엄마 마음에 상처를 줌으로써 앙갚음하고 싶다는 의지였고, 새엄마 이름 뒤에 갖다 버린 욕설봉투는 시궁창 같은 마음을 하소연할 곳이 이곳밖에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하 이게 완전히 돌았네.”
웃음 뒤에 공허함이 들이닥칠 창살을 예견했다.
언젠가 미술시간에 모자이크 기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색종이를 잘게 찢어 덕지덕지 붙였던 모자이크는 애당초 종이를 손으로 찢는 것부터가 이해가지 않았다.
그날의 예견된 고통은 일기장에만 가해졌다. 대신 묵직한 일기장이 눈앞에서 갈가리 찢겨 나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본드가 성글게 붙여졌는지 이내 겉표지만 남기고 통째 떨어져 나가 버렸다. 새엄마는 그마저도 성에 차질 않았는지 일기장 속지가 색종이 조각이 될 때까지 찢어 사방으로 흩뿌렸다.
퇴장을 알리며 힐끗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이번 한 번만 봐준다’는 듯 가증스러웠다. 이제는 제 구실을 못하게 된 딱딱한 일기장 케이스와 속지가 뜯겨나간 실밥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인생은 왜 이토록 엉망진창인거지? 이게 다 날 버린 그 여자 때문이야. 버릴 거면 애초에 낳지 말았어야지. 나는 십년 전 나를 떠난여자를 찾아야 할 명분이 생겼다. 두 눈 부릅뜨고 왜 나를버렸는지 따져 물어야지. 당신 때문에 아파했던 시간을 변상하라고 덤벼들면 뭐라고 할까. 대체 얼마를 받아야 내가 괜찮아질까. 괜찮아질 수는 있을까.
흩뿌려진 종이를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작은 조각들을 모아 연습장에 올려놓고 풀로 붙였더니직사각형 모자이크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