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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Jan 06. 2023

'쓰임'이 있는 사람

제 1화. 하루에 딱 3시간

“혜지야, 니 알바 해 볼 생각 있나? 하루에 딱 3시간이다.”



동네언니의 전화를 받은 건 여름방학이 막바지에 이른 늦은 오후였다. 계속되는 돌밥에 돌아버리기 직전이던 참이기도 했다. 서둘러 ‘코로나19 방역활동 인력 채용공고’를 검색했다. 평일 오전 11시부터 2시까지, 식사 후 급식실 식탁과 투명 가림막을 닦는 것이 주 업무였다. 급여는 시간당 10,990원. 22년 기준 최저시급 9,160원보다 세고, 고용보험 3.3%를 제하더라도 하루에 삼만 원 가량 벌 수 있었다. 하루 3만원씩 일주일이면 15만원, 한 달에 60만원씩 내 통장에 꽂힌다니. 상상만으로 온 몸이 달싹였다.






남편이 보우하사, 결혼 후 매달 생활비만 따박따박 챙겼지 일터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11년 육아라는 인생의 2막을 살아가다보니 애당초 나는 엄마가 되려고 태어난 건가 할 만큼 세월이 지나 있었다. 


놀이터 죽순이도 지겹고, 아이 엄마들과 만나 흉인 듯 아닌 듯 다른 집 아이 천덕꾸러기 만드는 험담에 이골이 났다. 문득문득 허탈한 감정이 일렀고 내 안에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녀석들이 손 가지 않을 만큼 컸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하루 3시간, 6개월이라는 정해긴 기간이 사회생활 체험판으로 적합했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 학교 급식실이라는 일터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이제 일 나가니까 혹시라도 제하 아프게 되면 기차타고 올라 올 마음에 준비하고 있으셔.” 

경단녀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 멀쩡한 일곱 살 둘째가 아플까봐 3시간 거리에 사는 늙은 엄마부터 찾았다. 

서류면접도 보기 전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돈이지만, 진짜 일하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임’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물론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을 부정하는 것을 절대 아니다. 굴곡진 내 가정사를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해 엄마가 된 이후 아이들만 쳐다보려 애썼다. 세상에 난 것은 모두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라는 인간의 쓰임은 양육이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 가르치고 성장시켜서 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온전히 지지하고 믿어주는 것. 


제기랄. 눈 감는 그날에야 비로소 나의 쓰임이 다할 것 같았다.     


눈을 뜨면, 어제 주문한 새벽 배송 식재료를 부산스레 정리하고, 남편의 간단한 아침식사를 챙긴다. 아이들을 씻겨 보내고 나면, 어제도 돌아갔던 청소기가 오늘도 돌아간다. 거실을 돌아다니는 블럭 나부랭이와 보다만 책들에 시선이 꽂힌다. 저걸 치워야 청소기가 돌아가니까. 끝도 없는 모래성 쌓기. 다시 무너질 걸 뻔히 알면서 주섬주섬 책장에 책을 꽂았다. 세탁물 정리까지 끝나면 그제야 성급하게 위와 장이 채워진다. 귀한 오전시간을 채갔다. 곧 애들 올 시간인데. 


모래성 같은 집안일의 굴레에서 나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라도 좀 더 생산적인 일에 도전하리라.








'불혹'. 어떠한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생긴다고 했던가. 애 둘 키우고 나니 아무리 쳐 맞아도 버틸 수 있는 단단하고 두둑한 생존 맷집이 키워져 있었다. 일머리야 하다보면 눈치 빨 일 테고, 여자들만 일하는 곳에 특성상 텃세가 조금 우려되긴 했지만 그것도 이내 적응하리니.


빠르게 이력서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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