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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소년 Jan 20. 2023

'쓰임'이 있는 사람

제3화. 반장님과 스카치캔디

“애기엄마, 나 뭐 한 가지 부탁 좀 하자. 말 좀 그만해. 귀가 아파죽겠어. 다른 사람한테 피해는 안 줘야 할 거 아니야?”    



           

밥주걱을 든 70세 반장에게 난데없는 폭격을 당했다. 볼기짝이라도 후려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은색 식판에 시금치와 배추김치를 배식하다 말고 3초간 정적이 흘렀다. 잔뜩 구겨진 종이가 되어 2차 배식을 마쳤다. 훌러덩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홀연히 사라지는 그녀를 뒤로하고, 동갑내기 조리원 소희 씨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제가 말을 그렇게 많이 했어요?”

눈빛으로 호소했다. 어서 내편을 들어줘. 아니라도 말해.     

“말이 좀 많긴 하지. 혜지씨가 애들이 이 학교 다녀서 그런가보다. 일일이 ‘맛있게 먹어’라고 할 필요는 없어요.”   



             





여름의 열기로 온몸이 화끈거리던 8월의 어느 날, 서류면접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연분홍색 스커트가 땀으로 찰방거렸지만, 얼굴에 찍힌 베개 자국이 화장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하루 3시간, 한 학기 알바생을 뽑는 자리에 면접관만 3명이었다. 교감선생님, 행정실장님, 영양사님까지. 각 부서의 수장들만 모여 있었다. “애들이 어리던데 중간에 아프면 어떻게 대처하실 건가요?”, “학기 중간에 못 그만두시는 거 아시죠?”, “결혼 후에 직장생활이 처음이시네요?” 관련직종에 관해서만 쓰는 게 좋겠다는 판단으로 10년도 지난 ‘방문교사’ 이력만 달랑 한 줄 적고 태연히 앉은 것이 못마땅한가 보다. 행정실장의 질문에는 분명 가시가 박혀있었다. 에어컨이 꺼진 걸까. 밀폐된 회의실에서 점점 숨 쉬기가 어려웠다. 육수처럼 뽑아져 나오는 비지땀은 구원투수의 등판으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궁금하거나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하세요.” 영양사님이었다.     


“작년에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방역아르바이트 하시는 어머님을 뵈었어요. 아이들 가슴팍에 명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살갑게 이름을 불러 주시더라고요. 물론 몇몇 아이들이었지만요. 한참 코로나 절정기라 등교 자체가 살얼음판이었는데 눈으로 한번, 입으로 한번 보듬어 주셨던 게 인상 깊었어요.

아, 제가 보기보다 곰살맞은 구석이 있거든요. 물론 결혼하고 한 번도 일해 본 적은 없어요. 감도 떨어지고, 사회성도 결여된 건 맞습니다. 그렇지만 집에서 아이들만 바라보았던 10년의 세월이 그냥 버려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여태 집안에서 충실하게 엄마 역할을 해낸 것처럼 이제 집 밖에서 다른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되어서 좋은 점은 대책 없는 용기와 빤빤한 낯짝을 필요에 따라 드민다는 점이다. 참신한 포부를 보여줘도 될까 하는 판에 구구절절 인생사를 늘어놓는 꼴이 되었다. 없어 보이게.








"지우 너 깍두기 좋아하더라. 많이 줄게.", "승환이 염색했어? 오 빨간색 멋진데.", "동호야 어제 아팠어? 왜 밥 먹으러 안 왔어?" 배식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아이들과 진한 눈 맞춤을 나눴다. 마스크를 쓰다 보니 유일하게 마주할 수 있는 눈이 더없이 귀했다.


어릴 적, 지금과 대적할 수 없을 만큼 학습당 인원수가 많았다. '장'씨였던 나는 주로 30번대에 속해있었다. 선생님들은 무언가를 시키기 위해서 내키는 대로 번호를 불러댔고, 어쩌다 성을 뗀 "혜지야"라고 이름을 불리면 그게 그렇게 반가웠다. 이름만으로 그가 나를 다 아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어'라는 뜻으로 알아차렸고 때문에 그 선생님 앞에서는 더 의젓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눈에 띄는 개구쟁이 아이들부터 딱 봐도 아웃사이더 냄새가 물씬한 아이들의 이름도 물어물어 입으로 되뇌었다. 배식이 종료되길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꺼내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 기억하기 좋게 특징을 함께 메모하는 것이 별스럽지만 근무하는 동안만큼은 '다정한 방역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날밤은 잠이 오질 않았다. 남편으론 성이 차질 않아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분통을 터뜨렸지만, 어딜 가나 그런 사람은 다 있으니 몇 개월이면 끝날 알바 조용히 입 다물라는 식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아침에 되어서야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3년 차, 5년 차 심지어 8년 차 근무를 한 사람도 있었다. 이 일에 인이 박혀서 더는 아이들에게 쏟을 열정도 기운조차 없겠지. 처음부터 입을 꾹 다문채 밥만 펐던 건 아니었겠지. 그럴 수도 있지.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데 감정을 소비하면 정작 제일 힘든 사람은 나였던 것 같다.

차가운 마음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두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안녕하세요?" 급식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머니 3 총사가 나를 반겼다. 30분 전에 도착해서 여태 스탠바이 중인 반장이 나를 부른다. 보라색 키플링 가방에서 스카치캔디 2개를 꺼내서는 손에 쥐어주었다.

"요즘 젊은사람들은 이런 거 먹나모르겠네. 나는 이 사탕 말고는 입에도 안 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선뜻 나눠주는 것, 그들만의 사과법이겠지.




금색 은박봉지를 까서 사탕을 입에 물었다. 버터맛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러 깨물지 않았다. 좀 더 오랫동안 이 달콤함이 입안에서 맴돌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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