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이 맛에 돈 버는 거지!
박카스 2통을 기분 좋게 계산했다.
8월 25일 2학기 개학일에 따라 근무일이 5일밖에 되질 않았다. 입금내역에 찍힌 **초등학교 153,860원을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이 작고 귀여운 돈으로 무엇을 하면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실은 첫 출근날 이미 머릿속에 시나리오를 그려 둔 터라 망설임 없이 약국으로 향했다. 여초직장의 새 동료들을 위한 조공품으론 카페인과 타우린이 적당히 함유된 박카스가 마침맞다.
“혜지 씨, 잘 마실게. 며칠 일 한 거 돈 얼마나 된다고. 앞으로는 이런 거 안 사줘도 돼요.”
얼핏 170센티도 넘을 것 같은 장신의 영양사는 단숨에음료를 삼켜버렸다. 목젖 뒤로 꿀꺽이는 소리가 우렁찼다.
"고마워요 혜지 씨. 마음이 너무 이쁘네."
유독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53세 조리사님은 말씨도 다정했다.
"여태껏 일하면서 음료수 사 온 사람은 애기엄마가 처음이네. 나 화장실 때문에 집에 가서 마실게."
두텁고 거친 손에 박카스를 받아 든 복자어머님은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행여 사 온 사람 서운해할까 봐 굳이 가방을 들어 보이며 챙겨 넣는 제스처를 취했다.
퇴근길,
153,860원 전액을 엄마에게 송금했다. 잠시 스쳤다 지나가는 숫자가 애석하기 그지없지만, 결혼하고 처음내 손으로 번 돈이 가장 의미 있게 쓰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꽤 괜찮은 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며칠 안 해서 적네. 왜 어릴 적에 첫 월급 받으면 부모님 내복 사 드리잖아.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걸 못 해 봤네. 운동화 하나 사 신어."
“월급 선나 받아놓고 야가 와 이카노? 윤서방이랑 애들 고기나 사주지.“
엄마는 누구보다 딸의 재취업을 응원했다. 신혼 초, 여자는 남편 그늘아래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하는 게 돈 버는 거라고 때때마다 나를 단념시켰던 장본인이다. 네겐 출중한 재주도 없거니와, 타지로 시집을 가서 애들 봐줄 사람도 없으니 그저 신랑이 벌어다 주는 돈 아끼면서 살라고 쐐기를 박아버렸다. 돌이켜보면 엄마가경험해 보지 못했던 당신 세대의 여성상에 딸을 투영시켰는지도 모르겠다. 퇴근할 남편을 기다려 자식을 어르고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아내가 되어보지 못했으니까.
"얘들아, 오늘 엄마 월급날이야. 너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난 피자!"
"난 치킨!"
피자 vs치킨은 정말이지 가혹한 선택이다. 둘 다 좋아하지만 피자는 웬만큼 먹어도 배가 차질 않아 남편과 나는 꼭 라면을 끓였다. 때문에 가성비면에서 튀김옷을 고루 입은 치킨을 시키는 쪽으로 매번 큰 아이를 설득해 왔다. 쭉쭉 늘어나는 치즈를 우걱우걱 밀어 넣으며 엄마가 산거라서 더 맛있단다. 그럼 됐다. 돈 버니까괜찮다. 애미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 아들아.
다들 이 맛에 돈 버는 거구나. 10년 만에 큰 성찰이다. 땀 흘려 번 돈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찬 일인지, 괜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하나, 둘 태어나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늘어날 때 가장으로서 어깨가 얼마나 짓눌렸을까. 입으로만 이해한다고 나불댔던 기억에 창피했다.
"자기야, 수고했데이. 나 며칠 일하면서 당신 생각밖에 안나더라. 여태 충실히 가장 역할 해 줘서 진짜 고맙데이. 10년만 기다려라. 그때는 내가 바통터치해 줄게."
"그래, 눈물 난다. 술이나 마셔라."
맥주 두 캔에 쏟아지는 졸음은 어쩔 수 없다. 충분히 서로의 노고를 위로했고,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얻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