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토박이 25년째, 칠곡으로 이사 온 지 4살 때였나 기억도 안 나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찍어주신 사진들을 보고 내가 이때부터 이 동네에서 주름잡고 있었구나 간신히 알 수 있던 터이다. 빛바랜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때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던 대구 소녀 중 하나구나 새삼 다가온다. 내가 처음 살던 칠곡 2지구의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그 당시 같이 놀던 동갑내기 친구와 바짓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개구쟁이의 모습으로 찍힌 나, 동네에서 아리아피아노라고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소꿉친구와 내가 흰 드레스를 입을 거라는 둥 10살 밖에 안된 쬐끄만한 나이에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른 채 피아노 대회장 앞에서 서로 투닥거리는 모습이 담긴 나, 고등학교 때 눈시울이 붉어진 채 부모님과 졸업식을 함께 맞이한 나, 대학교 때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고 스무디킹에 가서 딸기스무디 하나 시켜놓고 해맑게 웃던 나 이 모든 순간이 정겨운 대구라는 도시에서 출발점을 같이 하며 울고 웃었던 소중한 곳이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다 똑같진 않겠지만 고등학교 때 대부분 통하는 국룰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나는 충분히 인서울 대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2학년 때는 본인의 처참한 성적을 깨닫고 현실과 이상을 오가며 대구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좀 가지다가 3학년 때는 발등에 불붙고 현실주의자가 되어서 성적 맞춤형 대학교로 굳게 향하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난 특별했나? 누군가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이 국룰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나는 성적 맞춤형 대학교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에 크게 흥미도 없었고 남들이 하니까 똑같이 따라 하기에 급급했던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평범한 지방대에 합격을 했고 전공을 선택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이 헛웃음이 나온다. 식품영양학과를 택했는데 먹는 게 좋아서 식품에 관심이 생긴 정도라고나 할까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경찰이 하고 싶어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였으며 내가 대체 어떤 걸 잘하는 사람인 걸까 나조차도 나 자신에게 의문이 컸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도록 책임은 다하자라는 소명으로 대학생활을 임했던 것 같다. 식품영양학과에 오니까 1, 2학년 때까지는 영양학, 식품학인 전공 공부와 더불어 통계랑 물리, 화학을 배웠고 3학년 때부터는 고급영양학, 식사요법, 한국조리 등 조리 실습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식품영양학과의 진로는 보통 영양사를 거의 90% 하게 되며 그 외에 영양교사, 임상영양사, 푸드스타일리스트 등의 다양한 길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나도 여느 아이들과 같이 취업시즌 중 나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럽게 전공을 최대한 살리고자 영양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양사에 한 걸음 나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한식 조리 자격증,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기 시작했고 캡스톤 디자인 활동도 하고 여러 식품 공모전에 나가서 내 작품이 당선작이 되어서 서울에 진출하여 대회를 나가기도 하였으며 수상을 탄 적도 있었다. 또한 학과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 2학년때부터 차장으로 활동을 하고 3학년때는 학과의 기획부장으로 집행부로도 활동하게 되면서 학과 생활을 열심히 해 나갔다. 이때까지도 사실 공부에 흥미가 어느 정도 생길 줄 알았던 나지만 공부보다 다른 활동에 더 관심이 가득했던 나였던 것 같다.
대학교 4학년 겨울이 시작하던 즈음부터 취업시즌이 시작되었다. 학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대기업 영양사 지원공고에 서류 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합격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합격한 대학 동기들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고 되게 어른 같아 보였다. 나도 그런 모습이 되고 싶어서 우러러보며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대기업에 용기를 가지고 지원을 했다. 과연 나는 합격을 하여 지금까지 경력 많고 대기업 타이틀을 걸친 멋진 영양사가 되어 있는가? 아쉽지만 전혀 아니다. 대기업에 지원을 하고 서류 합격, 1차 면접 합격의 맛을 봤기 때문에 최종 면접까지 합격하며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으나 '귀하는 역량을 갖춘 좋은 인재이지만 함께 모셔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불합격 문구들이 예상치 못하게 앞길에 펼쳐졌다. 내가 대박이 터진다거나 특별하고 멋진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속적인 불합격의 쓴 맛을 느끼는 인생은 나의 레퍼토리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는 무얼 해 나갈 수 있는가 좌절스러움도 가득했다. 처음 느껴보는 멘탈 붕괴의 감정이었다. 그때는 대기업 영양사 합격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내 나이 24살이었다.
이후로 방 안에 틀어 박혀서 이불 덮고 벽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게 기억이 난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싫었고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던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서 친구들은 괜찮다고 토닥거려 주고 가족들은 딸이 최고라고 나만큼 마음이 안 좋았을 텐데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마음이 여렸을 터, 단단하지 못했고 갈대 같이 흔들렸다. 한 동안은 그렇게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가 문득 침대에 누워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읽었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24시간에 비유했을 때, 몇 시쯤 살고 있을 것 같은지 생각해 보라는 문구를 보았다. 한국인의 평균 연령이 80세쯤 된다 치면 24세는 고작 아침 7시 12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학교를 갈 땐 내가 아침을 먹고 있는 시간이거나 주말엔 한참 단잠에 빠져있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엄청 이른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생각했다. 어라, 나 아직 늦지 않았네. 서두를 필요 없겠다. 명성에 아등바등 사는 삶을 바라보지 말고 내 역량을 채울 수 있는 곳에서 무너진 둑을 천천히 쌓아 올려가자고. 그렇게 나는 요란했던 빈 수레에 마음의 양식을 쌓고 인생길을 다시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가진 곳은 어딜까하며 탐색한 후 조금씩 서류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구에 있는 중형병원의 영양사로 합격하게 되어 첫 사회생활에 발돋움하게 되었다. 다닌 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적응할 무렵쯤 면접 본 선임 영양사 선생님이 나를 합격시킨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밝고 긍정적인 면이 좋았고 무엇보다 공기가 답답하다고 말했을 때 내가 먼저 나서서 창문을 활짝 여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하셨다. 신기하면서도 어벙벙했다. 하지만 내 자신이 나를 믿고 갔기에 스스로 얻어낸 따뜻한 결과물이었다.
영양사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면 균형 잡힌 급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식단을 계획하고 조리 및 공급을 감독하는 등 급식을 담당하며 급식관리 업무 외에 영양교육 및 상담, 영양지원과 같은 영양서비스를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자라고 되어있다. 영양사의 전반적인 업무는 환자에 대한 식단을 준비하고 식품 재고 조사와 식수와 단가를 맞춰가며 거래처를 통해 식품을 주문하여 공급받아 사람들에게 3대 영양소를 고려한 알맞은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영양사의 업무들이다. 내가 하는 그 외의 업무는 환자들을 라운딩 하며 영양교육 및 상담을 하고 6명의 여사님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이었다. 내가 영양사 일을 하면서 느꼈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라는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식단을 짜고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환자나 직원들에게 배식을 도와드리며 한 분 한 분 눈 맞춤을 할 때 마음속에서 샘솟는 행복을 느꼈으며 당뇨나 통풍이 있는 환자들에게 라운딩을 하며 그에 맞는 영양 상담을 진심을 담아 따뜻하게 해 드린 후 개선되는 모습을 지켜볼 때 또한 뿌듯함을 느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거느리고 통솔하는 리더십을 가진 면에서는 부족함을 느꼈다. 가끔 거래처에 원재료를 주문한 후 당일에 원재료 상태가 좋지 않거나 주문한 양이 아닌 터무니없는 무게가 왔을 때 거래처 사람들에게 완곡하게 잘못됨을 인지시키고 언성을 높여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다양하고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여사님 6분을 관리하고 조리할 때 내가 생각한 의견에 맞게 조리 명령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내 본래 타고난 성격인 것 같았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또 모순적이게도 사람을 관리하고 통솔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영양사로 반년정도 일한 뒤, 환경에 점차 적응해 갔지만 나 자체의 모순에 대한 의문스러움은 마음 한 구석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영양사라는 일이 나에게 적합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부조화스러웠다. 나는 곰곰이 고민을 해보았고 이내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다. 영양사는 본래 하는 업무 외에도 사람을 많이 마주하는 일이며 카리스마 있게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필요한 직업인데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음과 동시에 사람들과 얼굴을 붉혀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상당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나에 대한 에너지를 잃는다는 것을 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인지하고 난 후의 고민의 문장은 바뀌었다. 영양사를 그만둘 것인가에서 그만두고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식품영양학과 전공을 살려 살면서 한 번쯤 일해봤으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느꼈다. 그만두는 것에 대해 내 믿음이 있으니 전혀 두렵지 않았다. 좋은 영양사 직업을 왜 그만두냐, 영양사 경력을 쌓아서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 남들의 시선이나 회유가 다가와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만큼 자신을 성찰하고 깊게 살핌으로써 나는 자연스럽게 강인해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와 함께 더불어 나는 예전부터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하며 혼자 살아보고 싶었다.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품어지고 있는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스스로 헤쳐나가 보고 싶었다. 막연하게 머릿속에서만 두둥실 독립하는 그림을 그리던 나였는데 밑그림에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걸 직접 내가 발로 뛰며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언가 더 큰 세상에서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많은 걸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발 디딘 적 없는 서울이란 도시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꿈을 위해 쫓아가는 대구 토박이 소녀였다.
어떻게 이런 용기와 패기가 가득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에 가슴 깊숙이 피어오르는 들끓는 꿈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사계절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1년 3개월 정도 지난 시점인 10월 중순.
나는 차분하게 외쳤다.
"저 영양사 그만두겠습니다."
선임 영양사 선생님은 나에게 다시 되물었다.
"그만두고 그럼 이제 뭐 할 거니?"
나는 대답했다.
"제가 하고 싶은 것 직접 찾아보고 싶어요."
그렇게 다가온 25살의 가을의 끝자락, 패기 넘치는 서울 집 구하기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