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생각나는 음식

by 선셋진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추적 60분이라고 친한 친구들에게 카톡에 한마디 던지면 에이 그게 뭐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로 좋다. 왜냐하면 그만큼 비 내리는 소리와 비 냄새가 느껴지는 비 오는 하루가 좋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내 마음 자체가 고요해짐을 느끼며 빗물과 함께 고단했던 시간들이 함께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빗물 한 방울 씩 창문 밖에 있는 난간 위에 톡 떨어지며 일정한 리듬으로 노래를 만든다. 그 노래에 깊게 귀 기울여 본다.

가끔 그 노래가 격해지고 웅장해질 때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짙어 지고 우르르 쾅쾅 천둥 심벌즈를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려준다.

창 밖의 가로등 켜진 도로 길 양쪽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목에는 빗물이 가득 고여 있는 웅덩이가 보인다.


차올라 찰랑찰랑 움직이는 웅덩이만큼 보글보글 끓고 있는 파를 송송 썰어 놓은 얼큰한 라면이 생각난다.


적당히 찌그러진 한 세월 함께한 금빛 양은냄비에 물을 채우고 면을 넣는다. 빗 소리 연주를 들으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물이 끓으면 빨간 스프를 넣고 면에 국물이 자글자글 스며들 때까지 끓이고 어슷썰기한 대파로 대미를 장식하면 비 오는 날 맞춤형 라면이 완성된다. 동그란 아스팔트의 고여 있는 빗물 웅덩이만큼 숟가락으로 라면 국물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어 한 입 하면 햇빛 쨍쨍한 날 먹는 라면과는 또 다른 맛이 난다. 그리고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는 듯한 오동통한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서 면발 사이로 공기를 후후 불어 넣어준 다음 입천장이 데이지 않을 만큼의 따뜻함을 유지한 채 호로록 입 안으로 넣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집으로 나와 빗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본다. 내 손에 쥐어진 우산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물들의 장단에 맞춰 내가 도착한 곳은 을지로 3가 골목 언저리. 빗질이 덜 된 파마머리와 대충 걸친 청자켓과 방수 재질 같아 보이는 검정 슬랙스, 그리고 이 정도 비에 때 묻지 않을까 살짝 걱정 되는 흰 운동화를 신은 나는 살짝 아련한 눈빛으로 골목을 거닌다. 시간은 저녁 7시 반쯤 남짓 되었고 해는 이미 저물어 깜깜한 저녁이고 불 꺼진 노점상이나 가게도 여럿 보인다. 골목 안 쪽으로 더 거닐어보면 빗물 사이로 반짝이는 전광판들을 마주하고 빗속 날씨 때문인지 원래 그런 건지 가게 이름도 보이지 않는 술집도 몇몇 보인다.


그 중, 약간 기울어진 어색한 천막 밑으로 포장마차처럼 국물 가득 담긴 냄비와 주전자에 담긴 뽀얀 색깔을 자랑하고 있는 막걸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도 저기서 먹어야 겠다 라며 친구와 나는 마치 둘이 원래 그 가게에 앉으려 했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빈 자리에 마주 앉았다.

그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단연코 잘 익은 해물 파전과 주전자에 담겨진 뽀오얀 막걸리였다.


“여기 해물 파전 하나랑 막걸리요” 라고 크게 외치며 천막 위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물들을 바라 봤다.


이 곳에선 신나는 댄스 음악, 잔잔한 재즈, 차분한 발라드 음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귓속에 들리는 노래 소리 없이도 충분히 준비된 분위기였다. 그저 좋았다. 친구와 웃고 떠드는 사이에 바싹 잘 익은 해물 파전과 주전자 안으로 찰랑거리고 있는 막걸리가 나왔다. 막걸리는 주전자 몸통 옆으로 몇 방울 흐르고 있었는데 이게 분위기지 하며 그것마저 좋다고 깔깔대는 우리였다. 젓가락 하나로 쭈욱 찢어 파전을 먹기 좋은 한 입 크기로 만들고 양은 그릇에 넘칠 듯이 따라 대는 막걸리 하나면 그거 하나로 된다.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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