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 더
며칠 전에 다녀온 병원에서 내 우울증 점수가 조금 높게 나왔다고 약을 처방해 주셨다. 치료가 필요한 수준까지는 아닐 거 같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필요한 수준이었다.
요새 남편과 잘 지내고 있는 편이라 기분이 썩 괜찮아서 그런 걱정도 했었다. 내가 정말 기분이 안 좋을 때 병원에 가야, 내가 얼마나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는지 제대로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표현하지 못해서 제대로 진단을 받지 못하고 오는 건 아닐까.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가자마자 검사지를 받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검사지를 작성하는데 첫 문항에서부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슬프다.’ 그 글자가 왜 이리도 커 보이던지. 읽자마자 눈물이 났다. 그런데 그 방에는 눈물 콧물을 닦을 휴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니 여긴 왜 휴지가 없어, 이거 작성하다가 우는 사람이 별로 없나?’라고 생각했다. 왠지 나도 별일 아닌 것처럼, 안 우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대충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체크해 나갔다. 나는 슬프다, 식욕이 없다, 성욕이 없다, 무기력하다, 예전보다 쉽게 짜증을 낸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숙면을 하지 못 한다, 등등 나에게 대체로 해당하는 말들이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도 내내 울었다. 과거의 괴로운 기억들 중에 굵직한 사건들을 몇 개 털어놨다. 선생님은 빠르고 빼곡하게 종이에 나의 말을 받아 적으시면서 매우 경청해 주셨는데, 슬쩍슬쩍 시계를 확인하시는 듯한 모습에 길게 얘기하기는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그새 꽤 많은 정보를 파악하신 것 같았다. “남편분도 같이 오시면 좋을 거 같은데, 아마 남편분께 말씀은 못 하셨겠어요.”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 다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아시는구나, 내 마음을 충분히 읽으셨구나 싶었다. 나중에 얘기가 잘 되면 와보시라고 하는 걸 보니, 남편의 욱하는 성격에 대해 직접 만나서 진단해 보고 싶으신 것 같았다. 만약 남편도 정말 병원에 다니게 된다면 본인 마음을 전보다 잘 살펴볼 기회가 될 것이고, 전보다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서로에게 이득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편은 평소에 집에서도 밖에서도 (내가 볼 땐 별일 아니라고 넘어갈 만 한데) 살짝 불쾌감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라 옆에 있는 나도 힘들지만 본인도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숨이 안 쉬어지는 듯한 증상까지 보이기에 공황장애 초기가 의심되어 병원도 몇 번 권해봤지만 굳이 가야 하냐며 매번 거절했었다. 남편은 ‘삔또가 상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그렇게 사서 스트레스받고 있는 것 같은 남편을 보고 있으면 예민한 게 꼭 개복치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금이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병원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아니겠나 싶지만 설득할 자신은 없다.
진료를 마치고 대기실로 나오니 한 명도 없던 대기자들이 다섯이 생겨있었다. 역시 내가 시간을 많이 끌었구나 죄송하네, 생각하며 원내처방인 약을 받아 나왔다. 상담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남편의 핸드폰을 보고 이런저런 사실들을 알게 된 거라고 말했을 때 선생님의 표정이 순간 찌푸려지는 걸 본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눈만 보이던 선생님은 일관되게 선한 눈을 하고 계셨었는데 그래서인지 아주 살짝 찌푸려지던 미간이,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마음에 걸린다. 이 브런치북을 처음 발행하고부터 ‘배우자의 핸드폰은 보면 안 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겼던 차라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받아온 약은 그날 저녁부터 먹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식후에 한번 먹는 약이라 그다음 날도 먹고, 그다음 날도 먹고, 꾸준히 먹고 있는데 아리송하다. 효과가 있는 건가? 기분이 달라진 건 느끼지 못했다. 너무 극적인 효과를 기대했나 보다. 하긴, 약 먹었다고 기분이 좋아지면 그건 마약이려나. 당장 변한 게 없는 것 같더라도 주시는 대로 우선 먹어보고, 선생님 판단에 끊어도 될 것 같을 때 끊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