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변신>을 읽고
불안한 꿈을 꾸는 현대인
카프카 《변신》을 읽고
《변신》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 문장에서 생각을 멈추게 된다. 불안한 꿈은 어떤 꿈일까? 어떤 꿈을 꾸었기에 벌레로 변했을까? 주인공인 그레고르는 유능하고 근면한 외판원이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며, 부모의 부채를 청산해야 할 멍에를 스스로 걸머지고 있다. 한 가정의 튼실한 버팀목이다.
그는 힘든 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방 출근을 다녔고, 동료들에 비해 과중한 업무를 맡기는 사장의 부당한 처사도 참아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생을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생활 가운데서도 ‘만약 부모님의 부양과 부채만 아니라면 이미 사장에게 보기 좋게 퇴직을 통고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빚을 갚는 즉시 직장을 그만두고 무언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그레고르의 이런 생각은 세상의 법칙을 거역하는 위험한 생각이다.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버린 이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철학자 레나바스는 좋은 음식, 공기, 빛, 구경거리, 생각 혹은 사색, 일 등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곧 삶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의 삶 속에 ‘노동’이 포함되는 것에 주목한다.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이라고 하면 크게 반발하고 싶지만 어떤 형식의 노동이 되었든, 노동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특별한 생각이 아니지만, 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는 그레고르에게는 ‘진정한 나’를 찾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세상의 법칙이,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위하여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모범적인 시민이다. 사회와 가족은 노동을 거부하고 경제력을 포기한 사람을 무용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무용한 존재를 넘어 낯설고 혐오스러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
카프카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곧 자신이라고 여겼다. 카프카는 법학을 전공한 후 보험공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다. 그는 빵을 위하여 직장을 다녀야 하는 현실과 글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많이 번민했다.
생활력이 강하고 사업능력이 뛰어난 카프카의 아버지는 물질로 환산했을 때 별 값어치도 없는 문학에 매혹되어 글을 쓰는 아들이 항상 못마땅했다. 카프카는 《유형지에서》가 출간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카드놀이를 방해한다고 화가 나서 “테이블에 놔둬!”하고 말했다. 카프카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방인보다 더 낯선 존재로 살고있는 자신에 대해 많이도 절망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직업이 곧 그 사람이며, 인간의 유일한 존재 양식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축출되거나 혹은 퇴출되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그레고리는 자본주의 시대의 룰을 거역하고 노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에 벌레로 변신하는 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자신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듯이 깊은 잠을 자고 나면 이 변신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자신을 보면서도 아침 일곱 시에 떠나는 기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과 약속된 제품을 어떻게 전할 지를 고민한다.
그레고르는 회사의 지배인이 찾아와서 ‘회사에서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레고르는 자신과 가족의 장래가 바로 그 성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위치를 위태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대로 지배인을 돌려보내서는 안된다’ 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레고르는 눈앞의 어둠을 지켜보면서 부모님과 누이동생이 이런 좋은 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안락, 이 행복, 이 만족의 일체가 지금 무서운 종말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하고 생각에 잠긴다. 현대인의 불안도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 아닌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본 부모님과 여동생은 처음엔 놀라움과 연민을 가졌지만, 경제능력을 상실한 그를 점점 혐오하게 된다. 그레고르의 몰골을 본 엄마가 실신했다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에게 사과를 던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레고르에 의해 부양되어졌던 가족들은 저마다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수위로 누이동생은 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어머니는 동네의 바느질감을 맡아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또 세 사람의 하숙인을 받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제 가정의 평화와 안락은 깨어졌다.
누이동생은 하숙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동생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레고르는 ‘음악에 이토록 매료당하는 데도 그가 아직 동물이란 말인가’하고 자신을 돌아본다. 그는 자신이 동경하는 미지의 자양분에 대한 길이 열리는 듯 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도 잠시, 거실로 기어 나온 벌레를 본 하숙인들은 이 집에서 나겠다면서 소동을 벌인다. 가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에게 관심과 정성을 보이던 누이동생마저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저것을 보살피고 저것을 참아내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잖아요. 그 누구도 또 저것도 그런 일로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그레고르는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선량한 아들로서 모범적인 시민으로서 최선을 다했기에 이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능했다. 경제능력을 상실한 그레고르는 더 이상 이 지상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고, 존재가치도 없는 것이다. 카프카는 눈앞의 계산에만 눈이 어두워 내면의 세계를 덮어둔 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을 동물이나 사물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세상이 만든 법칙에 얽매여 있고,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살고 있지만 그 세계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우리는 타인 혹은 너로부터 소외되었고, 또한 나로부터 소외되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물질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스스로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행위이다. 더 이상 나는 ‘나’가 아니다.
아침 신문을 펼칠 때면 ‘현대 사회에는 인간은 없고 소비자만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든 논리는 물질로 귀결되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마치 소비하기 위해, 소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인간을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으로 나누는 에릭 프롬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정감과 동일성에 대한 감각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존재양식의 삶을 산다면 나의 중심은 내 속에 있다’고 했다.
《변신》이 출판되기 전 카프카는 스타르케라는 화가가 책표지에 커다란 곤충의 모습을 그려 넣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카프카는 출판사에 ‘그 곤충 자체를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반대 의사를 전했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고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인간사회에서는 자유를 갈망하는 한 개인은 무가치하고 해로운 존재라는 것, 산업사회의 경제논리에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존재는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그레고르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레고르가 죽자,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 여행을 한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없어도 자신들이 지금 가진 직업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카프카는 《변신》의 중요 부분을 끝낸 후 펠리스 바우어에게 “그대여, 눈물을 흘리세요. 지금은 울 때입니다. 내 단편 이야기의 주인공이 조금 전에 죽었습니다.” 라고 편지를 썼다.
카프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오로지 정신적인 세계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감각적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적 세계 속의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