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읽고
시간의 노예, 내일의 노예가 된 현대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읽고
‘융화하지도 않고 융화할 수도 없는 존재의 부르짖음, 사람의 외침이라기보다는 부당하게 상처받는 짐승의 부르짖음, 이유도 모른 채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의 외침. 그것은 부르짖음이다. 이 절규에는 어떤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침묵에 의해 표현된다.’ 카뮈의 스승이자 철학가인 장 그르니에는 《이방인》과 카뮈를 이렇게 표현했다.
카뮈의 이방인은 출간되는 즉시 최대의 호평을 받았고, 종전 후 최대의 걸작이라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이 첫 문장에서 낯설고 기이한 무엇을 느낀다.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읽어나간다는 것이 난해하다. 카뮈는 《이방인》을 출간한 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주석을 담은 《시지프의 신화》를 내놓았다. 사르트르는 《이방인》은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증명하는 책도 아니다. 부조리의 인간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카뮈는 다만 제시할 뿐, 원래가 정당화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 그것은 정당화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라고 했다.
주인공 뮈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바로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영화관을 간다. 그리고 해변에서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가 ‘태양 때문’이라고 자백한다. 교도소에서도 자신을 변호하는데 심드렁하다. 남의 인생을 바라보는 듯 자신의 삶에 대해 무심하다. 뫼르소는 어떤 유형의 인간일까? 뫼르소는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뫼르소는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일상의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죽음에 맞선다.
카뮈는 《이방인》 의 미국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할 마음조차 없었기 때문에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카뮈는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게, 관능적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어떤 이는 ‘뫼르소의 부조리’를 ‘카뮈의 부조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카뮈는 17세에 결핵에 걸려 죽음을 경험했고,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리고 결혼과 이혼, 알제리의 식민지의 비참한 상황, 가난과 생활고, 공산당 활동에 대한 환멸 등을 경험했다. 카뮈가 경험한 세계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었다.
카뮈는 ‘이 세상은 모순, 이율배반, 불안 또는 무능이 지배하고 있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라고 보았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는 여러 인물이 투영되어 있지만, 카뮈가 경험한 부조리의 세계가 담겨있다.
카뮈의 부조리는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시간의 노예, 내일의 노예가 되어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모순된 삶을 살고 있다. 시간 속에서 더 이상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한 곡선의 어떤 순간에 이르렀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동안 시간에 속해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완강하게 버티고 선 시간 앞에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인 것이다.
부조리를 만나기 전의 일상적인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들, 미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인생 속에서 무엇인가를 뜻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부조리를 만나고 나면 모든 것이 흔들려버린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 모든 것이 다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행동하는 나의 태도, 이런 모든 것은 장차 죽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뫼르소의 사형집행으로 끝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하던 날,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다. 뫼르소는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느끼면서 어머니가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음을 상기한다. 뫼르소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
감옥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뫼르소는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자인 검사는 뫼르소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다음 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희극 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나는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뫼르소가 기독교인인 검사를 거부하는 것은 ‘부조리한 인간은 신의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군자인 척하는 자들은 부조리한 인간의 눈에는 기껏해야 자기변명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뫼르소의 삶이 통째로 법정에 선다. 뫼르소가 사회의 금기사항에 도전한 죄목도 한몫하고 있다. 뫼르소는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 죄목은 무엇일까? 자신을 방기한 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죄, 아니면 사회와 법을 조롱한 죄일까? 뫼르소의 행위와 그 주변의 사소한 사건조차도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주인공을 범죄와 사형집행으로 몰고 가는데 기여하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조건이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 두렵다.
뫼르소는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던져진, 반항적이며 책임 없는 부조리 인간은 정당화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검사는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말해달라’고 했다. 뫼르소는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카뮈는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뫼르소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자신에 대해 어떠한 변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을 느끼고,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칠 것을 요구한다. 이방인에 대해 장문의 평을 쓴 사르트르는 ‘카뮈가 그리는 이방인은 바로 사회의 이른바 놀이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 이변을 일으키는 저 기가 막힌 순진한 자들 중의 하나’이라고 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앙 소렐’도 감옥에서 자신을 변호하려 않는다. 쥘리앙 소렐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하이퍼 개미’의 상징으로 되어 있지만, 살인미수죄로 수형생활을 하면서부터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접어버린다. 오히려 죽음을 기다린다. 카뮈는 “한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들에 의해서라기보다 침묵하는 것들에 의해서 한결 더 인간답다.”라고 한다.
뫼르소나 쥘리앙 소렐은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오지 않는 미래의 시간 자체가 환상이요 꿈일 뿐이다. 부조리한 삶을 깨달은 자들은 권력과 힘과 희망의 거부를, 버팀목일 뿐인 위안을 주는 어떠한 것도 거부한 채 오로지 확신에 찬 죽음을 기다린다. 두 사람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결말을 극명하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응집된 그 열광적인 관심 이외의 것은 모두 다 마음속에서 지워버린다.
사형을 선고 받은 뫼르소는 “그래,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거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지금이던 20년 후건 여전히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말한다. 뫼르소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확신이 서 있다.
이 구절에는 카뮈의 죽음에 대한 성찰, 부조리에 성찰이 그대로 녹아 있다. 우리는 죽을 줄 알면서 끝없이 미래를 위하여 희망을 그리고 조바심치는 것이 모순된 삶이며 부조리한 삶이다.
뮈르소는 죽음을 앞두고 상념에 잠겨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날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유롭다는 가정에 얽매인 채 그 환상을 먹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스스로 노예가 되어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 환상들은 모두가 다 죽음 앞에서 무효가 되고 만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할 수 있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는 뫼르소, 그는 처음으로 세계가 자신과 닮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문득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죽음 앞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뫼르소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뫼르소는 자신의 숙명 안에 놓여진 죽음, 아니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숙명 앞에서 무한한 자유 즉 행복을 느낀다. 그에겐 현실적 의미는 무가치하고 무용하다. 죽음으로써 무용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카뮈의 죽음을 들여다본다. 1월 3일 갈리마르부부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스피드광인 미셸 갈리마르가 차를 운전하고, 카뮈가 그 옆에 앉는다. 카뮈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88쪽에 달하는 『최초의 인간』 원고도 챙겨 가방에 넣었다. 그 다음 날인 1월 4일날도 그들은 차로 달렸다. 5전 국도를 달리다 자동차가 갑자기 직선도로를 벗어나 플라타너스를 들이 받았다. 알베르 카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평소 카뮈는 “어린아이의 죽음보다 더 분노할 만한 것도 없고,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부조리한 것은 없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운명은 카뮈를 배반하고 자동차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사망이유를 달아주었다. 카뮈도 미래에 대한 환상과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죽음은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를 단숨에 멈춰버렸다.
부조리와 부조리가 내포하는 덤으로서의 삶은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의지의 반대인 죽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