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활’을 걸고 계신가요?

회복탄력성의 탁월함은 '그저 열심히'와는 다릅니다.

by 김경은

일을 하다보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유난히 그런 시기에는 일터 안팎의 매순간 긴장감이 들숨날숨에 배어있다. 유머는 희박해지고 고로 웃는 일도 더 적다. 반가운 얼굴을 오랜만에 마주해도 온통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고. 그럴 때의 나는 마치 소위 말하는 ‘사활’을 건,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 생로병사가 있다지만 유독 스타트업에는 그 존망을 가로지르는 ‘결정적’ 순간이 많다고 느껴지는 것만 같다. 느껴지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망하고 나서 “아 그때였구나, 우리의 결정적 순간” 하고 알아차린다면 영 소용이 없을테니 늘 사활을 걸듯 임해야 살아남은 현재와 근미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치열한 순간들의 연속에서도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사활을 걸듯이 임했을 때 과연 정말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나?"
0*XnhI65sOZ2DoOGAZ.png 고전


이 생각에 이른 것은 학창시절 스스로의 일화로부터다.


나는 도시 곳곳의 중학교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만큼은 공부들 열심히 했다는 학생들이 모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우리는 입학 전 겨울방학부터 미리 입교하여 다함께 입학 시험을 준비해야 했는데 채 서로를 알기도 전에 겁을 잔뜩 먹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불확실성에서 비롯한 불안과 싸우기 위해 다들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모두가 은근한 기대와 자부심을 잔뜩 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동기들의 속내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들이 아묻따 시험 공부에 온전히 매진하고 있는지 매일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모든 긴장되는 과정을 동기들은 어찌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더 넓은 세상에 나와보니 내가 터무니없이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처음 받아보는 성적표를 마주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어색한 동기들과 반강제로 입학 성적을 공유하는 순간에 억지로 괜찮은 척 웃어보일 수나 있을까? 이런 가능성은 늘 현재를 압도했다.


집중을 위해서라도 생각의 일단락이 필요했는데 고심 끝에 나는 일단 결과를 알 수 없을 때, 그러면서도 확률적으로 리스크가 더 높을 때는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가장 안전한 전략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으면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자평할지를 정해두었는데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100여명의 입학생 중 대략 80등 안에 들면 된다는 소결을 내렸을 것이다.


이후 입학 시험 결과 나는 30등 정도를 했다. 갓 17살이 된 모두의 온갖 희노애락이 오가는 교실에서 나는 아마 제일 기뻐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80등일 줄만 알았는데 내가 30등이라니!


입학 이후 수많은 시험이 더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시험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나는 저런 식의 (상대적으로 낮은) 기대치를 철저히 유지했는데, 이전의 결과에 따라 점진적인 상향조정이 약간씩 따랐을 뿐이었다. 결과는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은 결과를 내는 사람이, 정량적으로는 졸업할 무렵 자타 가리지 않고 예상치 못한 전교 1등이 되어있었다. 학업 성적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는 가장 탁월하다는 증표를 받은 셈이다. 비슷한 패턴은 중학교, 대학에서도 되풀이되었던 바 있다.


(그나저나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을 졸업하고, 그 나름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도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떠들다니 — 하고 너무 우스워하지만은 말아 주시길… 유치한만큼 직관적인 이야기도 있다고 믿어보며…)


물론 후회없이 열심히 한 시기였다.

그러나 매일의 결과 자체에 사활을 걸며 일희일비한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여 나는 이 일화를 “낮은 기대치를 갖고도 장기적으로 훌륭한 결과에 도달하는 법” 으로 요약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는 회복탄력성과 탁월함과 관련한 사소한 tactic이 내포되어 있다.

대개 회복탄력성이나 탁월함 같은 것들은 바꾸기 어려운 성향, 또는 삶과 함께 축적된 묵은 습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성향 또는 습관만큼이나 1) 환경 (훌륭한 input) 2) 그리고 유치한 수준으로 사소한 tactic 이 끼칠 수 있는 영향 역시 꽤 크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치열히 몰입하면서도 심신이 지치는 빈도가 덜했고 지칠지언정 금새 일상으로 돌아왔고 (회복탄력성) 또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탁월함) 얻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방법론의 핵심은 이렇다:

당장의 결과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기대치가 낮다는 의미는 이 뜻이다. 더 큰 궤적상 문제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결과는 이전보다 현재 더 나아졌다는 측면에서만 집중한다. 그렇다면 문제 없다!

대신 결과보다는 방법에 집중한다. 기대치와 실제 결과 간의 갭이 얼마나 크고 작았는지, 그걸 가르는 핵심을 고민한다.


그런 한편 다시 현재로 돌아와 문자 그대로의 ‘사활’을 걸 때의 나는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듯하다:

당장의 결과에 집착한다. 특히 이 당장의 결과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조차 간과한다. 당장의 도파민에 가까운 자족적인 숫자만 좇는다.

만족이 없다. 놀랍게도 불만족스러운 것들에 대해서도 초조함이라는 기분에 그친다. 그러니 무엇을 배웠는가, 는 쉽게 놓친다.

방법보다 결과에 집중한다. 빠른 지름길이 있을 것만 같은 탐스러운 결과, 특히 남들이 ‘이러했다 저러했다’ 하는 그럴싸한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요컨대 [단 하루 속에서도 삶 전체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만큼 그 하루에 충실한 것]과 [그 하루에 따라 내일의 살고 죽는 일이 결정된다고 믿으며 초조해하는 것]은 다르다.


물론 이 낮은 기대치를 임의로 오역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회의적이어도 된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저그런 결과물에도 관대해지자는 뜻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낮은 기대치를 잡아도 될까? 이건 또 다른 주제가 될 것 같으니 고민을 미뤄두고.) 대신 큰 목표로 다가가는 개별 과정들이 최종 목적지인 것처럼 현혹되지 말자는 뜻이고, 과정인 만큼 더 여정 자체에 집중해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언젠가 훌륭한 무언가를 만들 수만 있다면 과정에서는 틀려도 되고, roll-back 해도 되고, 번복해도 된다. 이게 아니면 안 돼, 가 아니라 후회없이 시도해보고도 안 된다면 또 새로운 것 해야지,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불필요하게 어깨에 힘 주고 인상 잔뜩 찌푸리고 있지 말아야겠다. (더 최악은 이러고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때’ 일 것.) 성공과 실패, 모든 과정을 진심으로 값지게 기념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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