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가 망친 십 대의 마지막 졸업식
코로나의 시작은 여태껏 있었던 다른 어느 전염병들과 비슷했다. 모두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전염병이 사그라들면 내게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내 인생에서 여러 유명한 전염병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나의 삶에 가까워진 적이 없었건 것처럼 이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이었다. 세상 모두가 이 전염병의 지배를 받은 것이.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생계를 위협했다. 우리는 평범했던 일상을 빼앗기고 사회 전체를 뒤바뀌었다. 어느 누구도 이 전염병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가 마무리되어 가며 뒤숭숭한 분위기가 지속될 때였다. 어는 누구는 대입진학의 스트레스를 이미 떨쳐냈고 어느 누구는 마지막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그중 마음 편히 졸업식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세상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였고 평화로웠다. 그런 나에게 코로나는 서서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심해진 코로나는 결국 내 십 대의 마지막 졸업식을 반에서 티브이를 보며 끝이 나도록 만들었다. 시원 섭섭한 십 대의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일부 학모님들을 제외하고는 학생과 선생님들 밖에 없었다. 시끌벅적하지 않은 첫 번째 졸업식이자 교복을 입은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나의 졸업식에 부모님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시지 못 했기에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일을 하러 가셨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를 서성이며 마지막으로 등굣길과 하굣길을 눈과 휴대폰에 담았다. 파란 하늘에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부는 봄의 시작이었다.
-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대학교 새내기 생활
나는 십 대의 마지막 졸업식은 못 했어도 이 모든 것들이 금방 사그라들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으로서 열게 된 새로운 인생의 첫 장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랬던 나에게 예상치도 못한 시련이 다시 한번 더 닥쳤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점점 더 심해진 코로나로 인해 부모님은 기숙사에 나와 함께 들어가실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계획을 변경하여 기숙사 입사 이틀 전에 인천으로 올라가 근처 호텔에 함께 묵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필요한 짐들로 빈틈없이 가득 채운 차를 타고 동이 트기 전 새벽에 집을 나섰다. 나의 짐들로 가득 찬 뒷자리에서 나는 창 밖으면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우리 집과 우리 동네를 서둘러 눈에 담았다. 우리는 5시간이 넘도록 고속도로를 달려 앞으로 내가 다니게 될 대학교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학교 구경을 하고 내가 살게 될 동네를 구경하자 하루는 금방 끝이 났다. 봄이 되기에는 아직 추운 겨울 날씨였고 그날 나는 부모님과 함께 인천에서의 첫눈을 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한 나의 첫출발은 즐겁고 행복했다.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서둘러 차에 올라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과 함께 나의 행복도 끝이 났다. 어제 내렸던 눈 탓에 더욱 추워진 날씨는 호텔 주차장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더 외롭게 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설렘과 기대로 들떠 있었던 나였지만 어느새 나는 혼자 살게 될 앞 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타지에서 홀로 보내는 첫날이 저물어갔다.
다음날 나는 홀로 나의 집이 될 기숙사에 들어가 수많은 짐들을 정리하고 홀로 점심을 먹으며 나는 다시 설렘을 찾을 수 있었다. 어제까지 앞으로의 날들을 걱정하던 나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새로움에 대한 두근거림이 나를 다시 가득 채웠다.
새로운 나의 집에 적응하고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한 온라인 수업에 적응할 때쯤 나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쳤다. 이제는 정말 잠잠해질 줄만 알았던 코로나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어쩌면 기나긴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는 추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며칠 정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면 될 줄 알았던 나에게 학교는 이번 학기 전체를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공지를 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학교는 내게 이번 학기 동안 계속 기숙사에 지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두 달 정도를 기숙사에서 지낸 후 나는 다시 나의 진짜 집이 있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기대했던 나에게 인천에서 있었던 첫 두 달은 외로움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컴퓨터나 휴대폰 속에 갇혀있었다. 새로운 곳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는 낯선 동네에 나는 혼자였다. 그랬기에 부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희망이었다. 나의 집이 있는 모든 게 익숙한 부산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 늘 그랬듯이 우린 답을 찾았다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동안은 굉장히 행복했다. 절대 집에서 다닐 수 없는 거리의 대학을 집에서 다닐 수 있게 만들어준 코로나가 어쩌면 조금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도 집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하니 가족들이 모두 있는 집에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면 외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집에만 있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나는 생각보다 더 빨리 집을 나갈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 답답함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찾아왔다.
어찌어찌 자유로움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갈 때쯤 코로나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했다. 코로나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물리적으로 앗아가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의 직장을 빼앗아 그로 인해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위험에 놓인 많은 사람들 중 우리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야기로만 듣던 환상적인 대학 새내기 생활을 집에서 인터넷으로만 하게 된 것에 불만이 생겼다. 어머니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을 하러 가야 되는 부모님들의 아이들을 돌봐주러 유치원에 가셨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셨기에 가장 먼저 실직의 위기에 놓이시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 힘들게 코로나가 찾아온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 분투하였다.
아버지의 실직 위기는 곧 우리 가족 전체의 시련이 되었다. 나는 엄청난 학비를 어머니와 다른 가족분들의 도움으로 충당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께서 실직을 하시게 되면 나는 대학을 그만두게 되어야 할 위기에 놓였다.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럽고 두렵고 화가 날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매일이 전쟁터가 되었다. 각자의 삶을 끝내고 나면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나와 소리를 지르며 싸우셨다. 그런 우리들 사이 어머니는 어떻게든 나를 졸업시키기 위해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매일 밤 돈 계산을 하셔야 했다.
우리 가족들이 치열하게 코로나 속 삶에 적응해 가는 사이 사회는 코로나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러게 서서히 우리 가족도 평화를 되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