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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 다음 기회에

축복받지 못한 탄생

by 이지은

누군가 나에게 네 첫 번째 실패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출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많은 실패 무더기 중에서 무엇을 하나 고른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 아무래도 내 첫 번째 실패는 딸로 태어난 것이다.


사실 그건 내 실패라고 하기에는 억울한 면이 많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Y 염색채를 가진 어떤 정자의 실패라고 해야 맞다. 그 녀석이 X염색체를 가진 다른 정자에게 뒤쳐지지만 않았어도 나는 남자로 태어났을 테니까! 아니 잠깐. 그랬다면 애초에 나는 없었으려나?


여하튼 나는 눈치도 없이 4킬로에 육박하는 초우량아 딸로 태어났다. 사람들이 신생아실에 아가씨가 누워있다고 수군거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엄마는 두 번의 유산 끝에 낳은 건강한 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딸이어서.

이 아이도 나처럼 힘든 삶을 살아갈 것이 너무 안쓰러워서....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살짝 감동할 뻔했지 뭐야? 하지만 곧 나보다 남동생을 더 이뻐했던 기억들과 계집아이가 왜 이렇게 지랄이냐며 등짝을 맞던 기억들이 우수수 떠올라 감동이 좀 가셔 버렸다.


여하튼 나는 그 순간 안타깝게도 여자로 태어난 존재였다.


나도 여자 하기 싫어! 이거 왜 이래!! 무효다!! 무효!!!! 하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갓 태어난 나는 "응애~ 응애~" 했으리라.


탄생의 순간에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을 있는 그대로 환영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극적으로 미움받은 것뿐만 아니라 나처럼 딸이라 안타깝다 같은 경우까지 다 제외한다면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딸딸… 아들' 낳은 집은 또 얼마나 많은가? 4남매다 5남매다 유난히 아이를 많이 낳은 집을 보면 대부분 막내아들을 얻으려고 출산을 계속한 경우가 많더라.


그럼 앞에 딸들은 뭐다?

….

눈물 나니 여기까지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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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당당히 생존한 것이다. 비록 잔뜩 쭈구리가 된 마음과 겉으로는 센척하는 ‘외강내유’의 방어본능을 갖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난 여자로 태어났고 당신 또한 책 읽는 달팽이가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여자일 것이다. 평생 여자로 살아야 한다면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리 불평을 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으니까.


그래!! 나 여자로 태어났지만 잘 태어났다!!

Y염색체의 실패가 아닌 X염색체의 성공으로!


축하한다!!

살아있잖아!!

여자라는 이유로 뱃속에서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태어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이렇게 우량하게!!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잖아?!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에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그 이유를 한번 찾아봐야 겠다. 죽는 순간 '내가 이것을 배우려고 여자로 태어났구나~!' 할수 있도록.


그러니 이제 난 여자로 본격적으로 잘 살아봐야겠다.

이왕이면 행복한 여자로 살아볼 거다.

응. 꼭!


이지은의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written_by_leeji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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