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게임을 허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게임을 아이 돌보는 '보모'로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의 많지 않은 유년시절 기억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나는 어두운 방에서 혼자 있다. 장난감도 조금 있었고 부엌에는 엄마도 있었다. 난 인형놀이가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와 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비어있는 책장을 인형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어떻게든 놀아보려고 했지만 너무 막막하고 외로워서 눈물이 났다. 엄마에게 놀아달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엄마는 늘 바쁘고 힘들고 화가 나있었기 때문이다. 싱크대를 향해 돌아선 등이 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 등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이 참 많았다.
"엄마~ 심심해. 놀아줘"
"엄마~ 모르겠어. 도와줘"
"엄마~ 이런 일이 있었어. 속상해"
"엄마~ 나 잘했지? 칭찬해줘."
그 말들을 삼키며 나는 많이 외로웠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결핍감은 그때의 외로움이 꽤나 많이 기여했을 거라 생각한다.
유년기의 정성 어린 보살핌은 아이에게 필수다. 엄마의 성격에 따라 더 잘 보살펴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모양과 색깔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부모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은 아이의 단단한 정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받지 못한 아이는 다른 곳에서 뭐라도 가져와 그 결핍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 때 달콤한 음식을 찾는다. 먹으면 잠깐이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스트레스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 친구나 이성에게 몰입하기도 한다. 관계가 주는 일시적인 연결 감은 또 얼마나 달콤한지!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가 부실한 아이들은 지나치게 타인에게 집착하게 된다. 친구의 말 한마디에 중심 없이 흔들린다. 필요 이상으로 주변사람들에게 끌려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관심을 끌기 위해 과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다 보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많아지지만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미성숙함에서 오는 갈등 상황을 떠받쳐줄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임은 어떤가? 이래나 저래나 여하튼 게임은 반응을 해준다.
"안녕? 반가워! 와 잘했는걸. 최고야! 선물이야~"
클릭하는 대로 반응을 해주며 상을 주고 놀아 준다.
책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책만 던져놓고 아이를 외롭게 방치한다면 아이는 지적으로 뛰어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의 결핍은 게임에 빠진 아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똑똑하지만 불행한 사람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서울대, 카이스트를 다니면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이 마음속의 빈 공간을 음식, 게임, 친구 등이 채워준다. 비워진 채로 놔두면 너무 괴롭기에 아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아이가 게임 중독이라면 부모는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아이와 함께 기쁜 순간을 보내고 있는가?
나는 아이의 말을 얼마나 주의깊게 듣고 반응해주고 있는가?
나는 아이에게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표현하고 있는가?
그 어떤 장난감도, 비싼 전집이 있어도 아이가 혼자 남겨져 있다면 그것은 방치다. 그리고 방치당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알 것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부모와 함께 수다를 떨고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이다.
아이를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아이에게 게임 밖의 세상은 즐거운 일이 가득하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된다. 물론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이 있을수도 있지만 부모가 너와 함께 할거라고, 그 모든 과정을 응원한다고 알려주면 된다. 그래서 나는 아이와 함께 게임을 해보라고 한다. 나오려면 아이 손을 잡아야 할것 아닌가. 아이가 게임 세상에 있으면 그 안에 들어가서 손을 잡자. 그리고 아이의 걱정을 들어주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찰하자. 부모는 아이를 세상과 이어주는 문과 같은 존재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때부터 쭉 그런 존재였다. 부모가 게임에 등장하는 순간 아이는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찾은 것이다.
게임에 대한 오해를 내려놓고
아이와 함께 밤 산책을 나가듯이
아이와 함께 요리를 하듯이
아이와 함께 게임을 하면 된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추억을 만들고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면 된다.
육아는 별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아주 일상적인 것...
그 이상이 될 필요가 없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은 목적을 가져올수록
오히려 좋은 관계가 되기 어렵다.
서로 부담스럽고 진짜 사랑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게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보자.
아이가 술, 담배에 빠졌다면 어떻게 함께 하겠는가?
아이가 이성친구에 빠졌다면 어떻게 함께 하겠는가?
아이가 도박에 빠졌다면 어떻게 함께 하겠는가?
아이가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어떻게 함께 하겠는가?
게임은 부모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다.
게임조차 못하게 해서 아이를 집 밖으로 내몰지 말자.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왜 그것을 원하는지 살펴보자.
결국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일 것이다.
아이의 행복을 원한다면 일단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사랑받은 아이가 행복하다.
그건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우리도 사랑받을 때 행복하지 않던가.
나는 아이를 키울 때 꿈이 참 소박했다. 아이와 함께할 때 사랑을 느끼는 것이 단 하나의 바람이었다. 그만큼 내 육아는 처음부터 바닥이었다. 아이가 안방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거실 쇼파에 앉아있는 내 가슴이 답답했다.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숨도 잘 쉬어지지 않고 머리도 아팠다. 아이가 이쁜지도 몰랐다. 아이가 자는 사진을 찍어 '악마 충전 중'이라는 설명을 달아 페이스북에 올린 적도 있었다.
웃픈 일화지만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내 마음은 참 지옥이었다. 육아를 본성으로 하지 못하고 일처럼 부담스럽게 하게 된다. 열심히 하면서도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 육아 자체도 힘든데 육아를 힘들어한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더 힘들었다.
그래서 난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할 새가 없었다. 아이와 인형놀이를 하고 같이 게임을 하며 아이와 웃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붙는 정이 귀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사랑만 생각하며 육아했다.
그렇게 키우고 보니 아이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사랑받은 사람이 풍기는 당당함이 있다. 하지만 남을 배려할 줄도 안다. 엄마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 것처럼 주변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도 높다.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털어놓고 잠시 쉬었다가 또 일어나 자기 갈길을 간다. 자신을 유능하다고 믿기에 학교 공부도 금방 이해하고 소화한다.
수학은 귀찮다며 놀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수업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수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나도 수학을 참 싫어했던 사람이기에 아이가 좀 하다가 말겠지 싶었다. 그런데 한 학기 보충수업과 숙제를 착실히 해가더니 학기말에 전과목 '매우 우수'를 받아왔다. 성적이 올라서 기쁘기도 했지만 그보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노력이 참 대견했다. 비단 성적뿐 아니라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자신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방황을 많이 했다. 만약 어두운 방에서 울고 있던 그때 엄마가 집안일을 잠시 멈추고 다가와 나와 놀아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사랑받을 만한 아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나를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삶을 더 아끼지 않았을까? 당신의 아이도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만큼은 아이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