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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흔한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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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Aug 26. 2022

쟤네 엄마가 나랑 놀지 말랬데

절친 엄마의 통수

아이가 정말 오랜만에 울면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는 엄마 말에 대답도 못하고

초등학교 4학년 아이한참을 "으앙~" 아기처럼 입 벌리고 우는 것을 보니 이거 확실히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래, 학교를 다니다 보면 울일 천지지.

선생님한테 혼이 났을 수도 있지

친구에게 아픈 말을 들었을 수도 있지.

펑펑 울고 나면 또 지나갈 일이다. 싶으면서도

통곡소리가 심상치 않으니 베테랑 엄마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그나마 다행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치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다는 점이다.

(딱 한번 저녁 먹을 즈음 슬쩍 물어본 건 빼기로 하자.)


12시가 되어 늦은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드디어 아이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낮에 말이야....

 ##이 엄마가 ##이에게 이제 나랑 놀지 말랬다고 했데.

그래서 이제 ##이랑 놀 수 없게 됐어. ㅠ_ㅠ"


헉! 엄마들의 필살기!

전설의 [쟤랑 놀지마] 스킬!

두둥!!


##이는 딸아이가 제대로 사귄 첫 단짝 친구였다.

(과거형 슬프다...ㅠ_ㅠ)

엄마밖에 모르던 아이가 단짝이 생기니 많이 컸구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절대 안 간다던 학원도 그 친구가 다니는 곳은 같이 다니고 싶다며 막 등록한 참이었다.

둘이 함께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 알고리즘을 타서 몇천 뷰를 기록했을 때 전화로 그 소식을 전하며 환호하던 딸아이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저녁을 자주 함께 먹다 보니 ##이의 입맛도 알게 됐다.

##이는 콩나물 무침을 좋아하고

과일은 먹지 않는다.

##이가 놀러 오는 날은 간식으로 떡볶이를 준비하곤 했다.


그 둘이 꼭 붙어 나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늦은 밤 아이 방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카카오 보이스톡 소리를 짐짓 모른 척해주기도 했다. 새도록 파자마파티를 한다던 아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잠든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웠던가...

우리 딸이 사교성도 좋고 밝다며 이뻐하던 ##이 엄마였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도대체 왜?!!"

하고 묻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격양돼있었다.


"나는 정말 몰라서 그랬어!! 정말 몰랐던 거야!"

항변부터 하는 아이 표정은 절박하고 억울했다.


"##이가.. 섹스가 뭐냐고 물어보길래... 알려...줬어..."

두둥!

.....


딸아이가 5살 무렵

아이가 어떻게 생기냐고 처음 물었을 때

나도 당혹스럽기는 했다.


알아보니 그 무렵 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발달이라고 한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좋지 않은 경로로 알게 되는 것보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나이에 맞는 언어로 성교육을 시키면 좋다고 하길래 그렇게 했다.


아동 성교육 동화책을 읽어주고

좀 더 컸을 때는 과학 만화 전집 WHY 시리즈 같은 것을 활용했다.

백과사전의 동물의 짝짓기 부분도 활용했는데

특별히 잠자리의 사진을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잠자리 둘이 만드는 하트 모양이 좋았다.

출처 pixabay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아기가 생기는 거야.

이것 봐 잠자리 두 마리가 하트를 만들었지?

사랑의 결실인 거야.

엄마랑 아빠의 사랑의 결실이 너인 것처럼."


아이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궁금했던 것을 알게 된 것을 즐거워했고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에 행복해했다.


나는 성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한 케이스다.

우연히 접하게 된 야한 소설과 야한 비디오가 나의 성교육 선생님이었다. (비디오 표지 제목 '바둑교실' 은 이상한 비디오 일수 있으니 조심하시오.)


반면에 엄마는 그 방면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분이셨다.


성교육 시간에는 채찍과 레즈비언이 등장하는데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바둑교실' 절대주의!)

정작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조선시대였다.

적장 배워야 할 사랑이나 임신, 피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그 빈 공간만큼 나는 방황했고 위험했었다.


내 아이는 절대 나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 했고

아이는 투명하게 그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 컸다.


성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모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로.


아이는 너무 솔직하게 ##이에게 아는 대로 말해주었고

멀리서 그 소리를 들은 ##이의 오빠가 엄마에게 일렀고

##이의 엄마는 성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우리 딸과는 앞으로 어울리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 무엇과는 멀리해라-

내가 우리 딸에게 폭력적인 아이는 멀리하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누구랑 놀지 말라는 말은 애지 간한 상황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정말 유해한 대상에게 하는 말이지 않은가?

내 딸이 유해한 존재로 취급당했다는 것에 열이 받았다.


아이는 상처를 받았다.

자신의 탓인 줄 알고 있었다.


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혀 아무렇지 않지 않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엄마가 들어보니 아주 과학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한 것 같은데?!

누가 물어보면 엄마라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아.

아니 그럼, 그걸 다르게 어떻게 설명해?

네 잘못이 전혀 없네~!"


안도하며 아이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아이를 안고 토닥이며 마음 고생을 많이 했겠다고 괜찮다고 말하고 또 말해줬다.


절친을 잃었으니 우울감이 며칠 아니 몇 달이 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아이는 생각보다 금세 괜찮아졌다.


종종 우리가 하는 그 말 덕분일 것이다.

엄마와 딸은 영혼의 단짝이니까

등 베프보다 더 친한

등 베프라고..


아이는 잘 커줬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유해한 존재로 비칠지라도 말이다.

이건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성교육에 관해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세상에는 아직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어둠 속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러니 누가 그런 것을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계속 물어보거든 너희 엄마에게 물으고 말하는 게 좋겠다고.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거라고 말이다.


##이 엄마에게 장문의 문자로

부모와 아이가 성에 대해 대화하는 경험이 을수록

첫 경험의 나이가 빨라진다는 연구결과를 들먹이며

내가 얼마나 딸을 금이야 옥이야 최선의 교육으로 키웠는지 설명하고,

우리 아이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해한 존재인지!

나도 이제 그쪽처럼 꽉 막힌 집안의 아이랑 놀게 할 생각 없어졌다고!

학원을 그렇게 많이 보낼 시간에 정작 부모가 가르쳐야 할거나 제대로 가르치라고!

흥 칫 뿡이라고!!

!!!!!!!!!


보내려다가 말았다.


우리 부모세대의 한계와 순진함이 떠올라서이기도 하고

열변의 문자를 보내든 안 보내든

잘 키운 내 딸의 반짝임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기에.

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딸아이와 ##이와의 정 때문이다.


그래도 통수는 아직 얼얼하다.


##이 엄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야!

흥칫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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