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 심청이
서 있는 곳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나이, 성별, 지역, 처한 상황 등에 의해 사람들의 관점은 결정되고 굳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나 역시 나의 전반적인 경험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변화하게 되었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병명조차 생소한 ‘시신경위축’이라는 안질환으로 나는 졸지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 나는 ‘심청전’이라는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딸 심청이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줄거리였다. 그 당시 보이지 않게 된 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해되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함께 공감하고 그의 눈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해,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게 보완적인 삶이자 최선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 때는 또 다른 생각이 피어 올라왔다. ‘나약한 시각장애인 아버지라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거야, 꼭 도움이 있어야만 세상을 버티고 살 수 있는 거야, 의존적이지 말고 자기주도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했더라면 심청이가 희생되는 비극은 없었을 거야, 누굴 탓하겠어, 모든 책임은 눈이 보이지 않는 당신의 잘못이지.’ 이러한 생각으로 ‘심청전’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런 내 생각이 옳고 정의라고까지 여겨졌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 나를 이해해주는 아내가 옆에 있고 토끼같은 자식이 생기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심청전’의 내용이 다르게 다가왔다. 시각장애인 아버지가 육아를 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젖먹이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하고, 다시 뛰어다니는 어린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요구되는 것은 참으로 다양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시각장애인인 심청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며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을 들여다 보았다.
아기의 분유는 일정한 온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뜨겁거나 차가우면 아기가 분유를 마지막까지 먹지 않는다. 그렇기에 분유를 타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 번째, 일정한 물의 온도, 두 번째, 분유의 적정량, 세 번째, 적절한 물의 양이다. 이 3가지의 조건이 완성되어야 아기는 힘차게 분유를 먹는다. 시각장애인 아빠에게 분유를 만드는 과정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확대경을 이용해 분유통의 분유량과 물의 양을 조절하고 물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 눈을 찡그리며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집중해서 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의 좁은 시야에서 아이가 벗어나면 행여나 다칠까 아이의 이름을 큰소리 부르며 찾는다. 그리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뿐일까. 목욕을 시키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려고 할 때는 어김없이 비눗기가 남아 있다. 또한 눈이 보이지 않아 동화책을 있는 그대로의 내용으로 읽어주지 않고 새로운 내용으로 꾸며내어 아이에게 읽어주기도 한다. 시각장애인 아버지의 삶은 하나부터 열까지 쉽지 않다.
누군가 그랬다. 부성애는 만들어져가는 것이라고. 나 역시 장애를 인정하고 온전히 아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과정을 심청이 아버지도 겪었으리라. 그래서 심청이가 배에 오르는 그 순간 심청이 아버지는 그렇게 목 놓아 울지 않았을까? 나에게 심청전은 이제 다르게 해석된다. 나는 비록 눈이 보이지 않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장애를 딛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 시간이 시각장애인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성장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