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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Dec 21. 2022

미선로 교동길에서 8

설원 드라이브 그리고 눈썰매

설원에 고립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야산 자연 휴양림에서 처가집 식구들과 1박을 하고 나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0만 km를 훌쩍 넘은 스포티지는 노후한 경유 차량답게 혹한의 날씨에 그만 얼어붙은 거였지요. 시동이 걸리지 않는 데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고 노래한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라는 시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손위 동서가 뜨거운 물을 기화기 엔진 위에 붓는 바람에 시동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대야산 휴양림에서 굽이굽이 속리산 눈길을 지나가는데 이만한 어드벤처가 따로 없습니다. 햇볕이 잘 든 길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그늘진 응달길은 차가 자율 운행을 할 것 같아서 심장이쫄밋쫄밋했습니다. 오르막길보다 무서운 건 내리막길입니다. 주식도 그렇고 눈길도 그렇고 아무튼 내리막길은 언제나 무섭습니다. 펌핑 브레이크 기술을 구사하며 내리막길을 주행하는데 마주 오는 차량이라도 있으면, 겸손하게 운전하게 되지요. 길은 위험했지만 길 좌우로 펼쳐지는 눈 덮인 산자락은 아찔한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의 극한은 언제나 현기증입니다.      


수안보 온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함박눈으로 덮인 고갯길인데요.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세상은 온통 하얀 충만감으로 펼쳐집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칸트가 말했던가요. 첩첩이 이어지는 설원을 바라보는데 숭고한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그것이 구원이겠지요. 우리 집이 소재한 괴산군 장연면은 수안보와 붙어 있답니다. 그러니 수안보에서 고갯길을 넘어서면 바로 장연면이지요. 그렇게 이어지는 미선로 그 길이 참으로 수수롭고 아늑합니다. 이곳을 지날 때는 영하의 날씨에도 차의 창문을 내려야 합니다. 차창을 내리고 천천히 운전해야 드라이브의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괴산의 밤은 더욱 춥습니다. 영하 18도를 체감하기 위해 마당에 나섰습니다. 마당에 가득 쌓인 눈 때문인지 생각만큼 춥지 않았습니다. 낭만 때문에 감각이 취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끝 모를 어둠 속에서 별은 드물었고 달은 밝았습니다. 때로는 명료한 별빛보다 흐릿한 달무리에 마음이 끌리기도 합니다. 마을에 어둠이 내리면 가로등 불빛이 켜지는데 내게는 지상에 내려온 별빛 같습니다. 바람이 불자 눈보라가 이는데 민들레 꽃씨처럼 흩날립니다. 소나무 위에 쌓인 눈은 작은 구름처럼 보입니다. 바람의 손길이겠지요.     


아침에 일어나 바라본 설원은 푸른 빛의 향연입니다. 세상을 온통 뒤덮은 하얀 눈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폴모리 악단의 Love is blue라는 연주곡을 들을 때마다 우울한 사랑의 빛깔은 왜 푸른색인지 궁금했습니다. 오늘 아침 바라본 설원의 푸른 빛은 우울한 사랑의 정감보다는 신비한 생명력의 충만함이 느껴졌습니다. 전원생활을 하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눈 내린 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뽀드득뽀드득 발끝에서 전해져 오는 질감은 자연을 접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신이 자연 어느 곳에도 있다고 믿는 편이기에 자연을 접하는 일은 곧 접신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집은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내리막길은 그대로 눈썰매장이 됩니다. 아내 홀로 산책을 떠난 시간에 나는 내리막길에서 비닐 포대를 타고 놀았습니다. 비닐 포대에 털썩 앉아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저절로 몸이 누워지는데 가속도가 점점 붙습니다. 발바닥으로 브레이크를 걸어 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안전사고도 나지 않을 것이니 그냥 미끄러짐에 나를 맡겨 버립니다. 놀이동산 눈썰매보다 재미있습니다. 나는 산책에서 돌아온 아내에게 자랑을 하며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겁많은 아내도 신나게 도전했는데요, 커브를 그리며 제멋대로 내려갑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신이 났습니다. 몇 번을 더 타다 보니 옷이 눈 범벅이 되고 급기야 비닐 포대가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작년 겨울 눈썰매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쨌든 포대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괴산에 눈이 내리면 이제 우리만의 멋진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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