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읍내 버스 나들이
오늘은 포항 영일만 근처 호미곶에 다녀올 예정이었지요.
자동차로 2시간 30분이면 동해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눈을 떠보니 세상이 온통 함박눈에 쌓여 있었답니다.
하늘에는 새벽의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데 들판은 하얀 설원이었습니다.
서울과 달리 시골의 작은 지방 국도는 아침 일찍 제설 작업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바라보는 세상은 낭만이었지만 가야 할 길은 현실입니다. 스노우 체인도 없는 상태에서 포항까지 눈길을 가는 것은 위험해 보였습니다. 대한이라는 절기답게 괴산 장연면의 수은주는 영하 12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의 장점 중의 하나는 금세 포기할 줄 아는 미덕이 있다는 점입니다. 포항 영일만 여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나니 스케줄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편히 쉬자고 했으나 나는 버스를 타고 괴산 읍내나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읍내에 가야 할 명분을 어렵지 않게 찾았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로 한 거였죠. 겨울철 시골 생활이란 도시 생활과 달리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독서는 참으로 유용한 킬링 타임입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선 운행시간표와 버스 정류장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순간을 대비해 면사무소에 들렀을 때 버스 운행시간표를 가지고 왔답니다. 참으로 주도면밀한 부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버스의 배차 간격이 불규칙합니다. 아침 9시 10분 차가 있고 11시 30분 차가 있네요. 11시 30분 차를 타러 나갔습니다. 버스 정류장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시는데요, 세상에나 아침 9시 남짓 도착해서 9시 10분 차를 놓치고 2시간 이상이나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할머니에게 시간은 인디언처럼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버스를 타면 좋은 점이 참 많이 있습니다. 눈길에 안전은 기본이고 창밖의 풍광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답니다. 자가용으로 운전하다 보면 아무래도 시선이 제한되는데 버스에서는 이리저리 둘러볼 수 있답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가까이 바라보는 마을 풍경이 정겨웠습니다. 언젠가 저 길을 걸어서 돌아다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전입 신고를 마친 아내는 괴산군민으로서 뿌듯한 정체성으로 무장한 채 도서관 대출증을 만들었습니다. 괴산 읍내에 있는 행복도서관의 대출증을 받는 순간 왠지 모를 뿌듯함과 충만감이 느껴졌습니다. 서울에 있는 도서관처럼 책은 많지 않았지만 볼만한 책은 제법 있었습니다. 채광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는데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책을 보다 도서관을 나서며 우리는 다섯 권의 책을 대출했습니다.
배낭에 담은 다섯 권 책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고 깊어진 마음으로 술집을 찾았습니다. 가슴이 깊어지면 술을 채워야겠지요. 검색도 하지 않고 우연히 들어선 ‘연탄 고추장 불고기’집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연탄에 구운 불고기를 노오란 배춧속에 싸 먹는 맛은 연남동 기사식당보다 좋았습니다. 괴산 읍내에 소문나지 않은 맛집이 많은데 이 집도 그런 맛집입니다. 소문나지 않은 맛집이라고 소문을 내고 싶은 맛집이었습니다. 음식도 맛있고 인심도 후한데 주인장님이 아는 지인분들이 특별했습니다. 마음공부 하시는 분부터 화가에 작가까지 다양했습니다. 주인장이 언제든지 소개해 주시겠다고 하니 또 다른 세상을 예감해봅니다.
1.2리터 괴산 막걸리를 나눠 마신 우리는 적당히 알싸해진 영혼으로 괴산 읍내를 가로지르는 괴강 하천길에 들어섰습니다. 눈 내린 하천은 우리 마음을 동심으로 안내합니다. 나는 아내에게 썰매를 만들어 태워주겠노라고 실현 가능성이 적은 약속을 남발했고, 그걸 뻔히 아는 아내도 좋다고 호응해줍니다. 썰매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유튜브를 몰래 봐야겠습니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는 마을 구석구석까지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합니다. 나는 그게 좋았습니다. 한가하게 창밖을 통해 알지 못하는 어느 동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예쁜 전원주택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도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연탄 불고기 사장님이 전해 준 명함을 보니까 인테리어 하우징 대표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곳에 땅을 사서 짓을 짓는다고 하면 소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눈 내린 오늘, 괴산 읍내 버스 나들이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데, 먼 곳에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