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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Dec 29. 2022

미선로 교동길에서 9

농사 싸부를 모시다

충북 영동에서 주말 농사를 짓고 계신 집사람 지인 부부가 오셨습니다. 주말 농사라고 했지만 천 평 가까이 경작하고 있고 각종 과실수를 키우고 있어 진짜 농부와 다를 바 없답니다. 관리기를 비롯해 각종 농기구가 창고에 가득하지요. 목공 시설도 갖추고 있답니다. 아내가 주말마다 가서 일손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던 바로 그 지인입니다.     

‘박씨네’라고 하는 농사 관련 유튜브도 매주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고 있죠. 농사뿐만 아니라 목공, 전기, 상수도 등등 못하시는 게 없답니다. 제게는 그 선배가 맥가이버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이든 원리를 알면 다 할 수 있는 법이라고 설법을 전합니다. 저는 그 분을 즉각 내 마음의 농사 싸부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농사 싸부는 전 주인이 남겨 놓고 가신 각종 농기구를 둘러보더니 하나하나 사용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톱, 전지가위, 해머, 도끼 등이 용도별로 서너 개씩 있었는데 그걸 일일이 구별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전지가위만 하더라도 잔가지와 굵은 가지에 사용하는 가위가 달랐고 높은 가지용은 또 따로 있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했지만, 사실 내가 직접 사용할 때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농기구가 용도별로 제각각 있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맥가이버 칼처럼 만능 농기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주인은 텃밭에 과실수를 많이 심어 놓으셨습니다. 밤나무, 구지뽕, 배나무, 매실, 아로니아, 블루 베리, 포도나무 등등 텃밭 가장자리에 심어 놓으셨는데 배치에 어떤 의도도 없어 보였습니다. 아내는 나무들이 질서 있게 있지 않다고 불평했지만 나는 자유분방한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싸부가 일일이 나무 이름을 호명할 때, 김춘수의 꽃처럼 비로소 그 나무들도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나무들은 내게는 다 비슷해 보였는데 이름을 불러 주자 비로소 다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싸부가 전지 작업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 주었습니다. 볕이 잘 들고 바람이 통하도록 잔가지들을 솎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안으로 뻗은 가지들을 쳐내야 가지끼리 겹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열매 맺는 마디 위쪽을 자르는 시범을 보이면서 나보고도 한 번 해보라고 합니다. 나로서는 처음 하는 그 일이 재미있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처음이니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하는데 싸부가 알려주는 농사 교육은 끝이 없습니다. 싸부는 알려 주시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도 되는 양 끝없이 설명이 이어졌고, 나는 초심자의 자세를 잃치 않고 시종일관 경청했습니다. 사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요한데 싸부가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랍니다.     

우리 집 앞의 솟대도 싸부가 지난 번 선물해 준 것입니다. 영동 싸부 집에 방문했을 때 선물 받은 것이었지요. 나도 극히 일부 작업에 참여하기는 했습니다. 솟대 부품을 결합할 때 망치로 친 것이 전부였지만, 마지막 완성을 내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싸부가 배려한 것입니다.


집사람이 싸부 집에서 만든 목공예 작품도 마침 가지고 오셔서 거실에 전시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무정형의 나무 기둥과 줄기이지만 배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듀상의 ‘샘’처럼 말입니다. 듀상이 화장실 변기를 새롭게 오브제하니까 예술품이 되었듯이 아내의 나무 기둥과 줄기도 ‘불꽃’이라는 예술품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에는 양산에 사는 처형이 조카와 함께 찾았습니다.


아내는 언니와 우애가 좋습니다. 만나면 일단 목소리 데시빌이 두 세배로 올라갑니다. 처음에 연애할 때 단아하게만 여겼던 아내가 언니를 만나 수다스러운 본색을 드러냈을 때 적잖이 놀랐습니다. 처형과 조카는 한목소리로 집이 너무 좋다고 한껏 높아진 데시빌로 감탄을 쏟아냅니다. 펠렛 난로가 불꽃 쇼를 시작하자 안락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내 삶의 로망이 바로 이거라면서 거듭 감탄을 이어갑니다. 내가 괴산 이 집을 살 때 뷰에 꽂혔듯이 처형도 뷰에 꽂힌 것 같았습니다. 조카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불멍에 빠졌습니다. 펠렛의 불꽃 쇼를 보면 누구든 무장해제당합니다. 치명적인 블랙 홀입니다.

유리창에 옹기종기 모여든 마을의 풍광을 바라보며 우리 마음도 수채화처럼 물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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