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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Dec 30. 2022

미선로 교동길에서 10

대야산 겨울 산행

괴산에 살면서 좋은 점은 어디든 언제나 떠날 수 있음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오늘은 모처럼 산행을 하는 날입니다. 문경 사는 친구 덕배가 아내랑 등산한다고 해서 합류하기로 한 것이지요. 우리가 겨울 산행에 덜컥 겁을 먹을 것을 우려한 덕배는 대야산 자락길을 걷는 수준이라고 미리 안심시킵니다. 아이젠이 없어도 가능한 코스라고 했지만, 겨울 산행이라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느 정도의 긴장과 어느 정도의 설렘으로 적당히 무장한 채 용추 계곡으로 향했습니다.      

쌍곡 계곡과 소금강을 지나는 속리산 구불구불 옛길은 블랙 아이스가 도처에 깔려 있어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지요. 그렇게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도착한 학천정 매표소  주차장에는 덕배네 차량만 홀로 한적하게 있습니다. 주중이어서 그런지 등산객은 물론이고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이곳 대야산 정상을 오른 적이 있었지만, 대야산이 절경이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아무도 찾지 않은 설원의 용추 계곡은 시원의 공간처럼 펼쳐집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으며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새롭게 시간이 기록되는 것 같았습니다. 길섶 왼쪽 아래로 맑고 찬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에 갈참나무 나뭇잎이 싸락눈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우린 월영대에서 잠시 쉬며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달빛이 신성하게 비치는 성문이라는 뜻을 월영대는 금방이라도 낮달이 떠오를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커피의 신맛이 특별하다고 하니까 덕배는 신맛을 내는 드립 기술을 설명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첫 드립을 잘 떨어뜨려야 한다고 했는데 그 오묘한 경지를 말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사과를 한 입 베어 먹는데 그 맛이 아이스크림처럼 아삭합니다. 아마 설탕 같은 싸락눈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 위로 뿌려지는 눈가루처럼 용추 계곡은 온통 설탕으로 만든 세상 같습니다. 우리는 육순의 나이를 잊고 동심으로 돌아가 동화 같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이를 먹어도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에 박하사탕처럼 우리 영혼이 화사해집니다.     

싸악싸악 눈길을 걷고 있는데 구름 위에 가려 있던 햇살이 우리 이마 위에 전면적으로 쏟아집니다. 겨울비는 서늘하지만, 겨울눈은 포근합니다. 햇살에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눈은 햇살의 온기를 반사하고 있습니다. 하여 세상은 더욱 포근해졌고 우리 마음도 더욱 훈훈해집니다. 나이를 먹으며 다들 어딘가 조금씩 아팠지만, 설원의 용추 계곡을 걷는 동안 싱싱한 청춘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요 등산회 모임을 갖자고 도원결의 아니 용추결의를 했습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겨울에 걷는 것을 싫어했지만 괴산에 와서는 꾸준히 걷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용추 계곡 산행에 이어 산막이옛길에 도전했습니다. 며칠 전 산막이옛길을 찾았지만, 찬바람 때문에 드라이브로 대신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산책하기 적당하군요. 산막이옛길을 걸으며 펼쳐지는 겨울 호수를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괴산댐 아래 펼쳐지는 얼음 호수는 색의 사중주였습니다. 하얀 눈과 파란 하늘 사이로 은빛과 하늘색의 눈이 나이테처럼 결 따라 색을 달리하는 모습은 환상입니다. 겨울 호수는 물의 결을 색으로 간직합니다. 물결이 푸른 빛으로 얼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 신비를 걸으면서 색다르게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차로 보는 풍경과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확연히 다릅니다.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겠지요. 그 풍경이 내 마음에 인화될 때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냅니다. 시린 손으로 찰칵찰칵 사진첩에 담습니다. 산막이 옛길은 나무 데크로 잘 포장해 놓아 중년의 우리가 걷기 딱 좋습니다. 멋진 풍광이 비쳐 들면 가던 길을 멈추게 되니 쉼 없이 오르는 등산보다 훨씬 편안하지요. 계단을 오르면 새로운 풍광이 드러나고 구부러진 길을 돌아서도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집니다.      

세상은 역시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관점이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하겠지요. 저마다의 관점에서 세상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저마다 진리이듯이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은 다투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이 중요하겠지요. 어디를 걷든 마음이 온전히 그곳에 함께 하면 우리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법이지요. 

우리는 연화협 구름다리는 봄날 다시 오기로 하고 산막이 마을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가다 힘들면 무리하지 않기로 했기에 돌아설 수 있습니다. 이곳 괴산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데 천천히 조금씩 돌아보자고 아내가 미소를 띠며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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