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첫 날
새벽녘 잠이 깼습니다. 귀촌 첫날밤이어서 그런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나 봅니다. 창문 밖이 희부윰해서 마당에 나가보니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있었습니다. 세상에나 꿈에 그리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영화처럼 괴산으로 이사 오는 첫날 서설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곳 미선로 교동 마을은 밤새 내린 눈으로 그야말로 설국입니다. 고추밭 위에도, 인삼밭 위에도 눈은 내려 세상은 한 빛깔로 통일되었습니다. 함박눈 아래 세상의 구별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함박눈 아래 지순해지는 마음은 같을 것입니다.
날이 밝기 전 저 멀리 마을의 가로등 불빛들이 밤하늘에서 내려온 별빛 같습니다. 어쩌면 밤 하늘의 별들이 외로워서 함박눈이 내릴 때 슬며시 동행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그 불빛 아래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었습니다. 뽀드득뽀드득 발끝의 질감이 온몸에 전달되면서 가슴속 감성 필라멘트에 스르륵 불이 켜집니다.
귀촌을 결심한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입니다. 3년 전부터 아내는 아는 지인의 농장에서 주말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충북 영동 그 먼 길을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매주 다녀왔지요. 주말 농장을 다녀올 때마다 아내의 얼굴에서 해사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그 곳 주말농장에서 어떤 행복한 일이 펼쳐지는지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아내는 무념무상으로 일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노을이 지는 백화산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답니다. 아내의 행복을 엿보기 위해 언젠가 나도 동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온종일 매실 열매를 따는 일이 나로서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어째서 이 힘든 일이 아내에게는 행복인지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은퇴를 앞두고 새롭게 인생 2막을 설계하는데 나로서는 특별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텃밭 농사를 함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했던 주말 농장의 경험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일이기에 전격적으로 믿고 따르기로 한 것이지요.
그때부터 귀촌할 마을을 찾으러 돌아다녔습니다. 양평부터 시작해 여주 충주까지 주말마다 우리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년 전 문경에 귀농을 한 친구 집에 갔다가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괴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에 수묵화 같은 산세가 신비로웠습니다. 세상에나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다니, 우리 부부는 드라이브를 하면서 연방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장연면 미선로 교동마을의 운치 있는 전원주택을 보고 바로 계약했습니다. 넓은 텃밭과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괴산에 아무 연고가 없었지만 마음의 끌림이 중요했습니다. 인연은 만들어 나가면 되겠지요.
함박눈이 내린 미선리 교동마을은 새벽이었지만 한낮의 햇살처럼 포근했습니다. 잠들기 전 바라봤던 보름달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사금파리 같은 별빛만 은청색의 하늘에서 소리 없이 깜빡이고 있습니다. 함박눈이 연출한 아름다운 비경에 탄성을 지르던 아내는 다시 단잠에 빠져들었고 서설에 잠 못 이루는 나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봅니다.
이 곳 괴산 미선로 교동 마을에서 인생 2막이 펼쳐 질텐데 밤새 함박눈이 쏟아졌으니 함초롱한 행복이 쏟아지겠지요.
괴산에서의 첫 새벽은 첫사랑만큼 잠 못 이루는 설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