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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Jan 24. 2023

미선로 교동길에서 19

후배샘의 방문과 꽃

지난 금요일에는 학교 샘들이 방문했습니다. 시험 기간이라 반일 연가를 내고 먼 길을 찾아온 것이지요. 차 안에서의 즐거운 수다와 창밖의 예쁜 풍경 때문에 오는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괴산 오시는 분들은 다 느끼시겠지만, 괴산 오는 지방 국도 길은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샘들이 도착할 즈음, 나는 데크를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내내 날아 온 송진 가루 때문에 오일을 바른 데크도 푸석푸석해 보입니다. 물걸레를 가지고 구석구석을 닦아내는데 초록 얼룩이 지워지지 않아 속상했습니다.
 마당에 물을 뿌리는데 하얀 민들레가 그런 제 마음을 위로합니다.
 세상에 민들레가 하얗다니, 아내는 하얀 민들레는 귀하고 상서로운 꽃이라고 합니다. 마당 가득히 피어있는 하얀 영산홍의 눈부심 때문에 어디선가 하얀 민들레가 날라왔나 봅니다.
 
 오전에 교무실에서 만난 샘들을 이곳 괴산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에, 지난 주말 전통주 모임 때 챙겨 놓은 납월홍매주를 준비했습니다. 애주가인 후배 샘들은 서촌의 유명한 음식점 내외주가에서 파는 고급 막걸리하고 비슷하다고 좋아합니다. 마당에 피어있는 붉은 영산홍을 바라보며 납월홍매주를 마시니 우리 마음도 붉어졌습니다.
 
 괴산의 4월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4월 중순만 해도 성하의 날씨처럼 무더워 차양을 쳐야 했지만, 지금은 선선해 거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몇 발자국만 옮기면 바로 2차가 시작되는 것이었지요. 후배 샘이 그동안 수업 시간에 활용했던 유튜브 동영상 자료를 보여줍니다. 역사 선생답게 수업을 위해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 영상을 찍어 둔 것입니다. 화면 전환과 자막, 음악까지 PD처럼 깔끔하게 편집한 걸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8분 영상을 위해서 8시간 편집을 한다고 하네요^^ 후배 샘들 완전 짱입니다.
 
 이어지는 시간은 배화의 역사 유튜브입니다. 
 수학여행, 수련회, 체육대회, 축제 등등 배화여고의 지난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어느 순간 내 모습도 보입니다. 추억 속의 내 모습은 쑥쓰럽기만 합니다. 괴산 우리 집에서 샘들과 편안하게 한잔하면서 추억을 나누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학교 밖에서 노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직장 동료끼리 직장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너머’를 느끼고 사유하는 것은 새로운 기쁨입니다.
 
 산 그늘이 내려올 무렵 샘들이 더 늦기 전에 서울로 향했습니다.
 떠나기 전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샘이 인증샷을 찍는데, 재미있는 포즈를 부탁합니다. 그런 연출들이 모여 작품을 만듭니다. 늘 같은 포즈보다는 색다른 포즈가 웃음을 만들고 추억을 만듭니다.
 
 다음 날 텃밭 농사는 자기 스타일에 맞게 했습니다. 평소 요리를 좋아하는 아내는 씨 뿌리기, 평소 설거지를 좋아하는 나는 잡초 뽑기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보조 쉐프가 주방 청소부터 시작하듯이 농부 시다인 나로서는 씨앗을 뿌리는 일에 앞서 잡초 제거부터 하는 것입니다. 고랑을 만들지 않은 곳에 냉이 풀이 무성합니다. 냉이를 뽑는 내 마음은 미안했습니다. 냉이 풀 사이로 드문드문 분홍색 광대 나물이 예쁘게 고개를 내밀고 있네요. 냉이 풀과 광대나물을 뿌리째 뽑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냥 두어도 멋진 냉이 풀 세상이 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쁜 냉이 풀과 광대나물은 어쩌다 내게 잡초가 되었을까요?
 

하늘색 아기 별꽃만큼은 차마 뽑지 못했습니다. 조그만 별꽃이 펼치는 신비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차라리 이곳을 꽃밭으로 만들자고 했습니다. 아내도 흔쾌히 동의합니다. 200평 넘는 텃밭에 온전히 다 작물을 키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린 쉬엄쉬엄 대충대충 하자는데 합의를 보고, 올해 망치면 내년에 다시 한다는 마음으로 텃밭 농사를 즐기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마당에 모란이 피었다고, 화단에 할미꽃이 피었다고 미소가 가득합니다.
 난 사실 모란의 강렬함과 할미꽃의 휘어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내가 좋아하길래 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무리지어 무성하게 피어있는 모란의 자줏빛에 한이 서려 있는 듯 느껴집니다. 고개 숙인 채 피어있는 할미꽃의 하얀 털이 성에처럼 느껴집니다. 모란과 할미꽃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을 터인데 내 마음에 비치지 않네요. 나는 꽃을 사랑하려면 아직 멀었나 봅니다.


 음지에서 자라고 있던 꽃을 양지에 옮겨 심었는데 오히려 시들해졌습니다. 아내는 그 꽃에 미안하다며 줄기를 쓰다듬는데 반려 식물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꽃은 자신이 뿌리를 내린 곳에서 잘 자라나 봅니다. 그러니 함부로 꽃을 옮겨 심으면 안 된다는 세상의 이치를 배웁니다.
 뿌리 내린 본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도 본성을 존중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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