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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Dec 08. 2022

미선로 교동길에서 4

수컷으로서 장작을 패다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기계치입니다. 내가 군대 훈련소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분해된 총기를 결합하는 일이었죠. 총기 결합은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도 배웠는데, 누군가는 눈을 감고도 한다는데 나는 눈을 뜨고도 멘붕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 내가 이케아에서 의자 부품을 구입해서 조립했을 때의 그 기쁨은 세상 전부를 얻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의자 하나에 세상 전부라니 과장이 심하다고 느끼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내 손으로 무언가를 조립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희열을 느꼈지요. 기계치의 기쁨은 실로 소박합니다. 괴산 일기 2에서도 말했거니와 나는 요즘도 내가 직접 달아놓은 커튼을 아주 대견스럽게 바라보곤 합니다.     

전원생활을 하려면 시시콜콜한 집안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며칠 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기름보일러 센서기에 01이라는 에러 코드가 뜨더니 작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괴산의 밤은 서울보다 춥답니다. 나는 침착하게 즉각 유튜브를 검색했지요. 착화 불량이라고 나옵니다. 보일러 통을 분해해서 착화를 감지하는 부위를 잘 닦아 주면 된다고 유튜버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보일러 통을 이리저리 살피고 시행착오를 겪다가 드디어 열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맨 위 버튼만 돌리면 되는 간단한 조치였지요. 유튜브에서 본대로 착화 센서 부분을 뽑아 꼼꼼히 잘 닦았습니다. 그리고 기름보일러를 다시 켰습니다. 여전히 01 에러 코드가 뜹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조치를 할 수 없군요. 원인을 알았어도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날 밤 전기장판이 없었더라면 펠렛 난로에 불을 붙여 그 곁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해 진작에 장작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친구 덕배에게 부탁했더니 트럭에다 한 루베를 싣고 왔습니다. 어린 시절 겨울이 오면 아버지는 연탄을 내 키보다 높게 잔뜩 쌓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올겨울도 추위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는 흐믓한 표정을 지으시곤 했지요. 주차장 한쪽 끝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장작을 바라보며 그때의 아버지 표정을 내가 짓고 있었습니다.          

펠렛 난로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펠렛 연료를 위에서 넣어 점화시키면 불꽃이 아래로 향합니다. 나는 처음에 그 광경을 보고 어째서 불꽃이 아래를 향할 수 있는지 신비스러웠습니다. 지상에서 중력에 자유로운 건 불꽃과 나비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위로 솟구치던 불꽃이 맹렬하게 아래로 불을 뿜고 있으니 뉴턴의 중력 법칙이 심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작이 너무 커서 쉽사리 불이 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작을 뽀개야지요. 괴산 읍내에 가서 도끼를 구입했습니다. 손도끼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내 생각은 판단 미스였습니다. 조기축구회에서 일찍이 장작을 패 본 경험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참나무 장작은 지나치게 단단했습니다. 손도끼로 힘껏 내리쳐도 장작이 쪼개지기는커녕 도끼날이 퉁겨져 나옵니다. 손목이 얼얼했습니다. 아무래도 손도끼로는 파워가 약한 게 분명합니다. 나는 사격에서 영점을 잡듯이 내리칠 곳을 예비 동작으로 타점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한껏 온 힘을 모아 내리쳤습니다. 찍혔습니다. 쩍 갈라지지는 않았지만, 도끼날이 장작에 찍혔습니다.      

장작에 찍힌 도끼를 통째로 들어 올려 시멘트 바닥에 내려쳤습니다. 마당 전체가 쿠웅~ 묵직하게 울렸습니다. 시멘트 바닥이 부셔져라 한 번 더 내리쳤더니, 집사람이 깜짝 놀라 창문을 열고 걱정스럽게 괜찮은 거냐고 묻습니다. 나는 수컷이다. 그런데 장작을 뽀개지 못한다면 수컷도 아니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내에게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안심시켰지요.      

나는 기계치이지만 상상력만큼은 갑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수박만한 돌덩어리가 보였습니다. 그 돌을 번쩍 들어 장작에 박힌 도끼 위를 내리쳤지요. 와우~ 주욱 갈라졌습니다. 그 위험천만한 일을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정확히 조준해서 한방에 장작에 도끼를 꽂고, 그 상태로 시멘트 바닥에 쿵쿵 내려치고, 마지막 헤비 스톤을 번쩍 들어 도끼에 내려 꽂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석기 시대 버전입니다. 그 과정에 살갗이 벗겨지고 손가락 끝이 멍들기도 했지만, 자랑스러웠습니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소설에서도 주인공 코니 여사가 산지기가 장작 패는 모습에 훅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는 소설 속 산지기라도 된 것처럼 수컷으로서 자부심에 어깨를 확 펴고 턱을 거만하게 치켜올렸습니다. 팰렛 난로를 열고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장작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불꽃은 정염처럼 흔들립니다. 불꽃을 바라보며 우리는 술을 마셨고, 뭉근한 장작불이 너울거렸고, 그 모습에 우리는 둘 다 훅 갔습니다. 창밖엔 노오란 초생달이 떠올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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