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로 산책
우리 집 도로명 주소는 미선로 교동길이랍니다.
미선로라니요... 네 맞아요. 괴산 IC에서 빠져나와 우리 동네 길목에 들어서면 가로수에 미선나무가 가지런히 있답니다. 괴산군에서 장연면에 미선나무 자생지를 따로 마련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선나무는 한국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로 천연기념물이랍니다. 돌밭처럼 척박한 곳에서 자라는데 미선나무는 개나리보다도 가녀린 느낌을 준답니다. 겨울이라 아직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봄이면 연분홍 꽃잎을 날리겠지요.
아참 그러고 보니 괴산은 느티나무 산이란 뜻이어서 마을 어귀마다 느티나무가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네요. 미선로 교동길에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내는 동제장(洞祭場)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곳이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푸딩이랑 미선로를 산책합니다. 하루 중 제일 소중한 시간이랍니다. 우리 집 뒤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세상에나 보이지 않던 마을이 새롭게 펼쳐집니다. 대부분 외지인이 지은 집들인데 타운 하우스처럼 비슷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모습입니다. 주말에 별장처럼 사용해서인지 사람들 모습이 눈에 띄지 않네요. 미선로에는 현지인과 외지인이 어울려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현지인이 외지인에 대해 텃세를 부리지도 않고 오히려 잘 정착하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산책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 힘듭니다. 한참을 걸어도 먼발치에 이따금 사람이 보일 뿐입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컹컹 짖는 푸딩이를 생각하면 산책하기 적당한 길입니다. 물길 건너 펼쳐진 산에 산허리를 감싸며 철새가 무리 지어 날아갑니다. 그 모습이 사진이나 미술 작품에서나 보았을 풍광입니다.
볕 좋은 겨울 오후의 산책은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살얼음 아래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 게으른 햇살을 받아 고즈넉합니다. 반투명한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이 마치 가물치가 헤엄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등 뒤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동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릅니다.
정남향 방향으로 지어진 전원주택에는 햇살이 전면적으로 쏟아집니다. 쏟아지는 저 햇살을 캠핑용 안락의자에 앉아 무방비로 맞으면 온갖 근심이 증발해 버립니다. 맑은 햇살 속에 멍때리면서 차 한잔하는 그 순간이 전원생활의 낭만입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푸딩이는 꼬리를 바짝 내립니다. 진화심리학자 나자루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낯선 상대를 마주하면 맞짱을 뜨거나(Fight) 도망가거나(Flight)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우리 푸딩이로 말할 것 같으면 백이면 백 도망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도 바짝 긴장하고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도망치는 거지요. 그때는 주인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 녀석과 보조를 맞추려면 같이 뛰어야 합니다. 제대로 운동을 하게 됩니다.
돌아오는 길의 풍광도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고은이라는 시인이 노래했지요. 내려갈 때 보이는 첩첩산중이 빛의 결을 달리하며 웅장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짙은 갈맷빛 너머 푸른 빛이 좋습니다.
초록빛 산이 깊어질수록 어째서 푸른 빛을 띄는 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을 그리워하기 때문일꺼라는 상상만 겨우 할 뿐입니다.
햇살은 무수히 많은 입자로 부수어져 온 들판에 평등하게 뿌려집니다. 그 풍광을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아 좋다~’만 연방 터뜨립니다.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풍광이 있는 법이지요.
산책을 하다 동네 어르신을 만나면 무조건 인사를 건넵니다. 교동 마을에 이사 왔다고 하면, ‘어디서 왔느냐?,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이구동성으로 묻습니다. 이제 환갑을 지났다고 하면 젊은 사람이 왔다고 좋아하십니다.
뒷집 홀로 사시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들고 인사를 갔더니 반갑게 맞이합니다. 나는 두 손을 꼬옥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게 좋았던지 다음 날 고구마 한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가끔 말벗이라도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적요로운 햇살 아래 할머니와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곳 미선로 마을이 평화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