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ertiveness(자기주장)의 문화충격
MBTI T인 전 남자친구와 연애를 할 때 문화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남자친구는 타인에게 자기주장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었고, 그 상황을 여러 번 지켜본 나는 적잖이 놀랐다.
'아니,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신상에 큰 위해 없이 몇십 년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거였어?'
자기주장을 직설적으로 펼쳐도 꽤나 좋은 기능 수준, 좋은 퍼포먼스를 내고, 큰 탈없이 생존해 와 내 옆에 있는 그 당시 남자친구를 보며 다소 허탈하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온 나는 배려가 잔뜩 묻은 의사소통이 익숙하다. 나와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 조심해서 말했다. 상대방의 경계선을 아직 모르니, 혹시나 불편감을 느끼지 않을까, 혹시나 내가 상처 주지 않을까, 혹시나 의도와 다르게 전달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사 하나도 고심하고, 섬세하게 단어를 골라 머릿속에서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그런 나의 세상에 '타인에게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직설적으로 펼치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이 갑자기 깊숙하게 찾아온 것이다.
또 하나, 신기했던 점은 '단언적 어조'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가 좋겠어."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근데 네가 가장 많이 고민했을 테니 그건 너의 선택이야." 혹시 모르니 약간의 가능성은 남기고 싶어 'just in case 화법(?)'을 주로 사용하는 나와는 다르게, 상대가 "~는 ~이다.", "이렇게 하는 게 맞다." 등 확신에 찬 '단언적 화법'을 사용하는 것 또한 신기했다. 아무리 내가 잘 아는 분야여도 어떻게 저렇게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지가 그 당시에는 참 신기했다. 사실 아직도 글을 읽을 때 단정적인 어조를 사용하는 글을 보면 확언적인 모습이 멋져 보여 따라 하고는 싶지만, 여전한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신기하다.
정리하자면, 배려가 부재한 직설적인 의사소통 방식과 단언적인 어조가 그 당시 내게는 생소했고 부러웠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문화 충격을 느낄 만큼.
물론, MBTI T와 F의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여러 사회문화적인 부분이 섞여있을 테다. 성별갈등을 조장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지만, 남자아이가 자기주장을 강하게 했을 때 받는 피드백, 여자아이가 같은 수준으로 자기주장을 했을 때의 피드백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는 정서감응이 높은 편이니 사회가 여자아이에게 바라는 딱 그 정도 수준의 자기주장을 펼쳤을 확률이 크다. (윽. 내가 펼치는 주장의 수준이 사회가 여자아이에게 딱 요구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속상하고 슬프다.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년간 정신과에서 근무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에게도 되뇌는 개념은 'assertiveness(자기주장)'이다. 자신의 생각, 감정, 권리를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하면서도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태도,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수동적이지 않은 건강한 자기표현 방식인 assertiveness를 그 당시 남자친구를 보며 깊이 체감하고, 체득하였다.
MBTI T의 대한 동경은 assertiveness를 복잡한 사고 없이 구사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가끔은 부럽고 얄밉기까지 하다. 저렇게 단순하게 사고하고 말하면 인생이 조금 더 수월하겠다 싶다. 가지지 못한 부분에 대한 동경이다.
그러나, 차마 글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MBTI F로서 강점을 생각해 보자면, F의 assertiveness는 더 멋진 구석이 있다. assertiveness 개념에서도 '감정'은 빠지지 않는다. '생각'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감정' 또한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수동적이지 않은 assertiveness를 펼치려면, '감정'을 포함하여 'warm and firm'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질 높은 assertiveness를 구사하기에는 F가 제격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왜 F로 태어나 자기주장 하나 하려는 데도 뭐 이렇게 많은 에너지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냐는 거다. T로 태어났으면 그냥 바로 했을 텐데 말이다. 하하.
아니다.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나는 나의 F 모먼트 덕에 인생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감각을 느껴 행복하다. F 모먼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실 이제 와서 사랑하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긴 하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