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름 일기

치열한데 평화로운 날들

+서로 자연스럽게 잊히면 좋겠다.

by 권여름


몇 달째 정말 똑같은 날들의 반복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옷 입고, 커피를 사서, 영어학원 수업 듣고, 자습실에서 영어공부하고, 밥 먹고, 다시 자습실 가서 공부하고, 집 와서 발레하고 씻고, 영어단어 외우고 자기. 다음날 다시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옷 입고, 커피 사서, 남은 영어 공부하고, 논문 읽고, 밥 먹고, 프로포잘 쓰고, 집 와서 발레 하고 씻고, 영어단어 외우고 자기.



모든 날이 치열한데 잔잔하다. 치열함의 정도가 비슷한 수준으로 매일 반복되니 꽤 평화롭다.



발레 시간을 제외하고, 몇 달째 눈 떠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해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 보통 이 정도 되면, 해야 할 일에 압도당할 법도 한데, 요즘은 불안하거나 조급하지 않다.

최근 인생 최대의 관심사였던, 결혼 걱정조차도 안 든다. 참 신기한 일이다.



치열함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법을 깨달아서 그럴까, 치열함과 단조로움을 기대보다 잘 견디는 스스로가 대견해서 그럴까, 대구 집에 있어서 엄마사랑을 넘치게 받아서 그럴까, 밥을 잘 챙겨 먹어서 그럴까. 요즘은 걱정이 요만큼도 없다. 바다가 아닌 저수지 같은 날들의 반복이 꽤 만족스럽다.

아! 공부를 하는 게 마치 명상 같다! 마음 챙김을 하는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 챙김을 하루종일하고 있으니 행복할 수밖에...



그런데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지금의 선비 같은 삶에 익숙해져 버려서, 일 인분을 해내야 하는 노동자의 사회생활에 다시 적응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글자 속에서 치열하게 지식의 체계와 사소한 진실을 탐구하고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 좋다. 훨씬 더 평화롭다.


그러나 나의 본분은 블루칼라. 화이트칼라가 적성에 맞는 블루칼라는 아주 조금 슬프다.



그것 말고는 정말 걱정이 없으니, 당분간 슬픔을 좀 미뤄야겠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치하해 줘야지.

몇 달째 똑같지만, 오늘은 정말 행복한 하루였다.





+추가:

최근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고 그 사람들 마음속에 내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잊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move on 한 것처럼, 혹시 모르지만, 그 사람들도 move on 하고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잊지 않고, 나보다 아주 조금은 덜 행복했으면 하고 무의식 속에서 바랬던 것 같은데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그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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