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순이여야해
오며 가며 동네 개들과 안면이 트이면 늘 이름이 궁금했다.
부를 이름이 없어 가까워지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이름을 알길 없어 답답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누가 보호자인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마침내 혼자만의 이름을 지어 부른다.
작년 연말에 낯선 곳으로 이사해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고 탐방했다.
2주쯤 흘렀을까. 저수지 가는 산책로의 개천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할 때 그 개를 보았다.
하얀 털에 윤기가 돌았고 반쯤 접힌 귀는 귀여움을 더하고 반듯한 이목구비와 선한 눈빛이 시선을 끌었다.
내민 손에 경계심 없이 자신의 상반신을 내주었다.
간식으로 친해지고부터는 내게 온몸을 맡겼다. 방향을 틀어 만지라는 듯 휀스 쪽으로 엉덩이를 디밀기도 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양손을 번갈아 가며 내밀고 살짝 입질도 했다. 몸 구석구석 냄새를 맡으며 품속으로 파고드는 순둥이였다.
'김훈소설의 개'에 나오는 '흰순이'가 떠올랐다.
진돗개 보리가 사랑한 암캐! 보리의 첫사랑.
호칭을 궁리하던 중 '이름 모르는 개'는 나만의 '흰순이'가 되었고 우린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보는 친구가 되었다.
산책로 윗길 도로옆 컨테이너 건물 귀퉁이에 흰순이의 거처가 있었다. 나무로 지은 파란색 집은 아담하고 튼튼해 보였다. 집 주변을 살펴보니 부서진 의자와 빛바랜 테이블, 낡은 담요는 잡동사니들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말라빠진 똥은 어느 날 때때로 치워져 있었고 버려진 소시지 껍질과 뼈따귀는 누군가 함께한 흔적이었다. 흰순이는 보호자의 무관심에 완전히 방치된 개는 아니었다.
산책로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흰순이는 하얀 자태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라서 예쁨을 받았다.
행인들을 내려다보며 누군가 자신에게 간식을 주기 바라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듯했다.
인적이 드문 시간엔 네 발을 'ㅑ'모양으로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흰순이에게 간식을 주고 손장난을 하며 놀고 있을 때였다.
"혹시 아는 개예요? 친해 보여서요."
산책 중이던 여자 두 명이 어느샌가 다가와 물었다.
"아뇨, 모르는데요. 개를 좋아해서요."
"혹시 이름 아세요?"
흰순이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어서 초면에 주저 없이 물었다.
"우리도 모르는데 주인은 있는 것 같아요. 저기 건너편 목재소 사람이 산책시키는 걸 한 번 본 적 있어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묶여서만 지내면 어쩌나 마음 쓰였는데 산책도 하는군요."
월요일이면 주말을 혼자 보냈을 흰순이의 안부가 궁금해 간식을 준비해 저수지로 산책을 갔다.
흰순이 집이 가까워질 때쯤 반대편에서 웬 중년 남자가 흰순이에게 다가갔다. 흰순이도 그 사람을 안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그 사람은 비닐봉지에서 치킨 하나를 꺼내 흰순이에게 주며 머리 주변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잘 있었어? 도그, 어서 먹어."
'아니, 흰순이의 이름이 도그인가? 아니길 바라며 조심히 다가가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그 개 이름이 도그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불러요.
그 사람은 겸연쩍은지 "도그, 아빠 또 올게"라며 바쁜 듯이 자리를 떴다.
흰순이의 진짜 이름이 도그인양, 자신이 흰순이의 진짜 아빠라도 되는 듯.
흰순이는 졸지에 '도그'가 되었고 중년남자의 딸이 되었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네 개를 '도그'라고 부르듯 또 누군가는 '백구'라고 불렀다.
희면 일단 백구다. 난 흰순이가 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다.
사랑스러운 흰순이가 뻔한 이름으로 불리는 게 마뜩잖아 빨리 이름을 알아내고 싶었다.
보호자가 지어준 스토리가 있는 이름이 있을 터인데 대충 불리는 게 못마땅했다.
그날도 흰순이에게 줄 삶은 달걀 한 알과 고구마 두 개를 준비해 산책로를 부지런히 걸었다.
전방 30m쯤, 흰순이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알아보고 짖는 건 아닐까 내심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여느 때의 짖음과 좀 달라 무슨 일이 있나 조바심에 주변을 살폈다.
차 한 대가 컨테이너 옆에 주차를 했고 흰순이는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향해 두 앞발을 들며 짖었다.
"야이 이놈아, 밥그릇도 다 엎어놓고 물그릇은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해 놨어?"
반기는 흰순이와는 달리 중년 남자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억양과 말투로 흰순이를 혼냈다. 짜증과 화가 섞여있었지만 안쓰러움도 베여있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흰순이는 야단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며 반기는 걸 보니 필시 보호자인듯했다.
용기를 내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흰순이의 이름을 알아낼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니까.
"안녕하세요, 혹시 개 이름 물어봐도 돼요? 이름을 몰라서 부를 수가 없네요!"
"망치예요, 망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개의 이름이 '망치'라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했다.
"저는 이름을 몰라서 그냥 흰순이라고 불러요. 제가 좋아하는 책 속에 나오는 개 이름이 흰순이거든요."
흰순이의 보호자는 뜻밖의 말에 약간 놀라며 주변 정리 하는 일의 속도를 늦추고 내 말에 관심을 가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흰순이를 많이 좋아해요. 어찌나 예쁘고 순한지..."
"그래요? 사람들이 우리 개 많이 이뻐해 주니 좋네요."
짧게 대답하고 다시 흰순이에게 폭풍 잔소리를 퍼부었다.
차마 보호자가 보는 앞에서 간식을 꺼내 줄 용기가 없었다. 여차하면 나도 흰순이처럼 듣기 싫은 소릴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빨리 흰순이의 이름을 알게 되어 좋았지만 망치라는 이름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개 이름 중 역대급이다. 망치는 순하디 순한 개 흰순이를 닮았고 '나만의 흰순이'는 망치라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때 이름이 왜 망치인지 물어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늘 혼자인 흰순이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이 불릴까. 그러니 자신의 이름이 망치라는 것도 모를 것 같다. 그날 이후 확인 차 망치라고 몇 번 반복해 불러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내 목소리로 아는 것 같았다.
이제 흰순이의 진짜 이름을 알았으니 더 이상 내 맘대로 부르면 안 될 거 같다.
그런데 차마 망치라고는 더 못할 거 같다.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람과 교감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흰순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싶다. '망치'와 '도그', '백구', '흰순이' 중에서. 그럼 나는 흰순이가 원하는 대로 호칭할 거다.
흰순이를 망치로 부를 때면 니체의 명언이 생각난다.
이름에 너무 갇힌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부르는 이름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이름에 대한 고정관념을 망치로 깨부수어야 할지, '망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망치로 깨뜨려 바꾸어야 할지...